[sound of life] 가장 처음 생겨 가장 나중까지 남는 소리.
2024년. 8월 16일 아침. '브런치 스토리' 처음 발행.
1. 코끼리는 그리울 때마다 뼈를 만지러 간다.
대부분의 동물은 삶만 존재한다.
살아있는 것들과 다투고, 사랑하고, 생존하고, 생명을 만들 뿐.
죽음은 단절과 종료와 영원한 망각일 뿐. 과연...?
(사진 출처 : BBC 코리아 '거대한 상아를 가진 희귀 코끼리, 슈퍼 터스커의 생존은 왜 중요할까')
죽은 이후엔 모든 관계와 행위는 없다는 것이 인간의 관점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청개구리 동화는 양서류인 개구리가 엄마의 유언을 반대로 지켜놓고는 비만 오면 운다는 인간적인 각색일 뿐. 실제 청개구리는 낳은 엄마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실제 동물로서의 청개구리가 되어보지 못한 나의 한계. 인간으로서는 이미 동화 속 청개구리는 수 백번은 되었었고.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전승하는 것은 인간뿐. 과연...?
지금 까지는 그래왔다. 그래 우리는 죽은 왕의 유훈을 놓고, 장례를 놓고, 죽은 자들에 대한 평가를 놓고 지금껏 싸워왔고. 계속 싸워간다. 그것은 죽음 이전의 기억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지금 산 자들을 위한 싸움.
하지만 인간의 편협한 시야과 청각이 가진 착각은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에만 갇히게 만든다.
코끼리는 죽음의 장소가 있다. 죽은 가족과 친구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리워한다. 그들은 태어난 곳에 가서 가족의 뼈와 나란히 누워, 그 뼈가 된다. 살아있는 코끼리는 그리운 가족을 상상하며 서식지에서 한 참을 순례하듯 자신이 태어나고, 가족이 죽은 곳까지 순례하듯 먼 길을 다녀온다. 일종의 제사. 그곳의 무수한 뼈들 중에서 그리운 코끼리의 뼈를 어루만지고 두드리고 오는 것. 이것을 관찰한 영국 석세스대학교의 카렌 맥콤 박사는 구체적인 가족의 추억과 그리움이기보다는 '종족'에 대한 애착으로 설명했지만. 죽고 썩어 뼈만 남은 종족에 대한 애착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연결해서 떠올릴 수 있는 그리움과 더 거리가 가까워 보인다. 죽은 것들을 철저히 이질적인 존재나, 위협, 무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나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뼈를 만지고 그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도 뼈가 된 조상과 부모를 때마다 기억하고, 기념한다.
그래서일까. 상상(想象)이라는 말의 어원은 '코끼리를 생각하다'라는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정확히는 코끼리의 뼈를 놓고, 살아있는 코끼리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쩌면 생과 사를 나누는 죽음의 선을 넘나들며 생각하고, 없는 소리와 온기를 있는 것으로 내 맘에 떠올리는 것은 상상이며, 그것은 뼈에서부터 출발한다.
2. 뼈를 노래하다.
모든 노래와 음악은 소통의 몸체에서 '뼈'라고 상상할 수 있다.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제 삶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의식조차 희미한 한 장기수 어르신은 고향 이름과 늘 부르던 노래만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삶의 살과 피를 이루는 기억과 의식이 희미해도 남아있는 고향과 노래. 그것은 어쩌면 우리 존재의 '뼈'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BBC News 코리아 '가족 한번 보고 죽는 게 소원 - 북송 바라는 백발의 비전향 장기수)
종종 라디오에 대해서, 오디오 콘텐츠의 기획과 소통에 대해서 특강 요청을 받을 때가 있다. 강의 중간에 빠지지 않고 함께 불러보는 노래는 나이로도 나보다 한 살 만은 형님인 '깡'의 대명사인 과자의 CM송이다. 손이 가요 손이 가~라고 먼저 부르면 남녀노소 00 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 가...라고 답송이 들려온다. 모두 애써 입시공부하듯 외우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자이니치(재일 교포)들의 삶 속에서 아리랑 노래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자이니치 공존의 아리랑, 2013년 방송)를 취재하며 일본을 누빌 때도 그랬다. 한국어가 서툴러도, 본인의 국적이 희미해도 아리랑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노래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멀리 하와이로 떠난 일본인 2세(니세이)들 조차 고향을 그리며 아리랑을 부르고 녹음한 자료(정선아리랑 연구소, 진용선 소장)도 만날 수 있었다. '기쁨의 아리랑(중국, 김세영 노래)'은 기존의 아리랑과는 다른, 음악 전공자 교포(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의)의 목소리로 새로운 삶의 흔적을 단단한 뼈처럼 남겨두고 있다. 단순하지만 단단한 삶과 역사의 뼈. 그 뼈를 노래하는 것.
거대한 역사의 기록에서 평범한 민초, 백성들의 삶은 여린 살로, 뜨거운 피로 흐른다. 시대가 기록될 때는 흔적도 없어지고 만다. 오로지 공식적인 권력과 행정의 기록만 남기도 한다. 하지만 노래는 다르다. 900수 가까이 되는 정선아라리를 들어보면 그 안의 가사는 모두 작고 사소하지만 삶과 역사를 지탱한 민초들의 역사가 뼈처럼 남아 전해진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의 삶과 그 뿌리를 찾는 명작 '뿌리'의 쿤타킨테도 그런 구전 노래를 통해 뿌리를 찾고 역사를 기억한다. 쉽게 기억되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 잊히지 않는 것이 노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심장과 호흡의 '리듬'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노래는 그 '리듬'과 닮은 소통의 뼈이고. 죽음을 넘어서 서로를 이어주는 단순하지만 단단한 이야기가 되어준다.
3. 뼈의 소리.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토론에서 얼마나 서로의 진심의 뼈를 이해하며 언어를 주고받을까? 우리 마음의 뼈, 삶의 뼈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건 수시로 바뀌고 변하는 물렁한 삶과 마르고 증발하는 피의 언어만을 주고받아서이기 때문 아닐까?
실제로 뼈로 만든 악기들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정강이 뼈(티베트, 독일)나 당나귀 턱뼈(쿠바)를 통해 타악기와 관악기를 만들고 이용했다. 단순한 악기의 필요나 흥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4만 년 전의 사람들이 이 (새의) 뼈로 무엇을 노래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사진출처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악기, BBC News - 튀빙겐 대학교 소장)
나도, 너도, 우리는 모두 죽는다.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이 노래면 좋겠고, 음악이면 좋겠다. 내가 죽어 악기가 되거나 음악이 된다면... 그 뼈를 만지고 본다는 당황스러움을 이겨만 낸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다. 어떤 느낌일까? 산조대금의 구슬픈 소리일까... 단소의 청아한 소리일까... 퉁소의 투박하고 거친 소리일까... 어쨌든 음악은 신과 만나는 접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기쁨과 슬픔 같은 눈에 보일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 나누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소리의 출발점은 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그 뼈는 몸 안의 신체로서의 뼈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단단하게 단순하게 지탱하고 누적하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소리와 말과 음악에도 뼈가 있다.
당신에게 매일 건네는 내 말과 내 웃음과 숨소리가
뼈처럼 단단하고, 단순했으면 좋겠다.
그리워도 그립지 않도록.
<김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