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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Aug 29. 2024

벽과 사람, 통방과 층간소음

마음과 미움의 사이, 벽을 넘은 소리들. 

눈에는 눈? 귀에는 귀!


  포털 창을 열고 '층간소음'이라고 검색하면 바로 오늘 혹은 어제 층간소음으로 일어난 폭력사건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공포가 되어버린 슬픈 시대.  층간 미움의 시대다. 생활 거주공간의 소음은 사실 층간뿐 아니라 벽간, 혹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도 흔하다. 


  층간 소음의 원인으로는 발소리가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공기를 통한 TV소리 등도 포함된다. 일반 건물과 아파트뿐 아니라 취약한 주거환경에서도 옆집 소리에 격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사람은 오가지 못하는데 소리가 오가며 미움을 빚어내는 일은 도시화가 심해지며 따라오는 서글픈 풍경이다. 이웃의 이름은 몰라도 이웃의 소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힘과 성공 부의 상징답게 수직으로 솟은 건물들은 위아래의 사람들을 싸우게 만든다. 


(사진 : 김틈 - 서울 상암동,  2024년 여름 오후)


  건설산업 연구원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층간소음 갈등은 57%가 늘었다. 정부는 바닥 두께 시공 기준 강화나 추가조치, 층간 소음 갈등 해소 제도(이웃사이센터-한국환경공단 1661-2642)를 더 정비하겠다고 했지만 해결은 멀어 보인다. 


  왜 이웃의 소리는 내게 고통이 되었을까?


  좁은 땅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아파트와 수직으로 올라가는 건물 외엔 대안이 없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독립하고, 아파트에서 다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가장 익숙하고 편한 환경이다. 층간 소음조차도 에티켓과 교양으로 불편을 겪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은 말만큼이나 빨리 고양이 걸음과 '뛰면 안 돼'소리를 배운다. 키즈 카페에 온 아이들조차도 뒤꿈치를 떼고 걷고 뛰는 아이들을 본다. 그 아이들은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활 소음이 대부분인 '층간소음'의 문제는 서로 다른 취향과 시공간에서 나온다. 같은 건물에서 같은 직업을 갖고 같은 생활시간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만 모여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새벽일을 가야 해서 일찍 잠든 사람에게 위층의 발도장 소리나 TV소리는 삶의 불행처럼 귓가를 울릴 것이다. 한창 뛰어놀고 싶은 아이들 때문에 두껍게 매트를 깔고 살아도 수시로 인터폰이 울리고 무시무시한 욕설이 날아들 땐 억울한 마음이 드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자신들의 공간을 넘어가는 순간 방해와 위협, 고통이 된다. 

(사진-김틈 : 대구 동구 코오롱 강나루타운 아파트, 평생 주택에 사시던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머무시는 곳. 오히려 층간소음은 반가운 '손주 손님'의 증거로 반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반 걸음씩 물러서는 지혜도 곳곳에 많다. 무섭게 항의하기보다는 가족 모두에게 푹신한 슬리퍼를 선물하며 '새벽에 일을 가야 하니 밤 10시 이후엔 좀 조용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우퍼 스피커를 천정에 붙이고 새벽 두 세시에 켜는 보복의 화신도 종종 만났다.(이런 행위는 불법!)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전제가 될 수 없고 나만이 기준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슬픈 일들. 


   층간소음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다. 모여사는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리와 타인의 소리의 경계를 찾지 못해 괴롭고 괴롭히고 괴롭힘 당한다. 미리 서로를 이해했더라면 그 마음이 전해졌더라면 괴로움이 되기 전에 웃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소음보다 소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더 날카롭고 위험해졌다. 


   그래도 모두들 아파트 한 채를 갖길 꿈꾼다. 층간소음보다도 그 소음조차 사치로 보이게 만드는 아파트를 둘러싼 욕망은, 층간소음을 증폭시키는 거대한 울림통이기도 하다. 



  소리는 체온보다 민감하게 마음에 닿는다. 때론 희망으로...


  연극 '그때도 오늘'을 보면 일제강점기 감옥에 갇힌 두 청년의 대화가 나온다. 서로의 그리움과 처지를 말하며 응원하고 서로의 소리 덕분에 희망을 갖고 버틴다. OTT드라마 '무빙'속에서도 북한의 괴력 초능력자로 나온 인물들도 지하 감옥의 벽을 통해 조용히 속삭이며 희망을 말한다. 말로 서로 속삭이는 게 불가능할 땐 두드리고 긁어서 통방을 한다.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투사들도 함성대신 통방으로 희망을 꿈꿨다. 톡 두드리면 자음, 지익 긁으면 모음  그렇게 가장 값싼 시간의 편지지에 단순한 소리로 긴 이야기를 써서 마음을 주고받는다. 층간소음의 괴로움이 아니라 벽간 고독의 외로움이 더 무서우니까. 


   하지만 더운 여름 좁은 감방의 체온은 괴로움과 고통이 된다. 신영복 선생도 36.5도의 체온은 사람을 증오하게 만든다고 했다. 소리는 허용되지만 체온은 허용되지 않는 감옥의 여름은 층간소음을 견디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도 닮았다.  미움과 마음 사이에 소리가 있다. 보이지 않고 닫히고 갇힌 것을 넘어서 전달되는 소리는 인간에게 더 이해하라고 더 생각하라고 내려주는 알 수 없는 신의 말씀일지도 모른다. 


소음을 소음으로 잡는 기술


  자동차는 집을 갖지 못해도 꼭 갖게 되는 필수품이자 기본 생활조건이 되었다. 이 차에도 소음이 있다. 노면을 달릴 때 차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유리나 사이드미러에 부딪혀서 나는 풍절음이 소음이다. 특히 자동차 엔진과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소음이다. 무엇보다 차 안에서 내 취향과 달리 들리는 음악들도 엄연히(?) 소음이 된다. 그래서일까? 고성능의 고급 자동차들은 엔진 배기음, 자동차 엔진의 소리를 디자인한다. 더 매력적이고 더 자극적인 엔진의 소리는 부의 상징, 힘의 상징을 소리로 표현하는 거니까. 


   하지만 평범한 차의 엔진소리는 두통 유발요인만 된다. 자동차는 소리를 어떻게 다룰까? 두꺼운 고무패킹과 흡음재를 실내공간 곳곳에 배치하거나 자동차 디자인을 유체역학에 따라 잘 디자인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보다도 더 신기한 자동차 내부의 소음 제어의 기술은 '소음'으로 '소음'을 제어하는 기술(능동제어 소음저감 기술)이다. 소음과 소음이 충돌하면서 상쇄되는 과학적 원리를 활용해 실내에서 이어폰 없이도 제각각 앉은 좌석에 따라 다른 음악을 즐기게 하거나, 바람이나 엔진, 노면 소음을 다른 소음으로 상쇄하기도 한다. 

 

  윗 층의 층간소음이 싫어서 그 시간에 소음을 만들어내는 서글픈 아파트의 모습 같으면서도 그게 가장 비싼 자동차들의 신기술이라는 게 보는 관점, 듣는 청점에 따라 세상의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점이 '웃프다.'


'사람 사는 집의 소리'


  주로 노인들이 더 많이 사는 부모님이 계신 아파트에 가면 아이들이 아파트 복도를 통통 튀어갈 때마다 지나는 할머니의 부럽고 사랑스러운 눈빛을 본다. 한결같이 그 노인들이 하는 말은 '사람 사는 집'같다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웃의 층간소음이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집일까? 어쩌면 내 이웃의 소리는 내게 위안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삶의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소음을 틀어둔 라디오처럼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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