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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Aug 30. 2024

변온동물

기후가 된 절망과, 시 목마름. 목소리가 막힌 사람들.

시집은 더 이상

집을 구하지 못해 야박한 거리를 전전하는 시로만

겨우 연명하고 있다.

땀과 눈물로 꼭 쥔 시의 집이 없어서

시마저

사고팔 수 없이 희박하고.

시인도 희박하다.

그들이 찾아 노래해야 할 슬픈 목소리들은 목소리를 빼앗겨 희망이 희박하다.

(사진: 한겨레신문 2020-10-11 “10년 전 20대 청년 추락한 용광로…‘그 쇳물은 쓰이지 않았다’” 임지선 기자)

말은 노래가 되어야 한다


말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없어진 거리는

밥그릇 소리 요란한 싸움만 남았다.  

남은 말들은 쉽게 굳은 글로 자리에 멈춘다.

없으면 죽지만 있는지 모르는 산소처럼

쉽게 사고팔지 않는 시는 집을 잃고 죽어

칸첸중가의 바람 언덕에서 조장(죽은 뒤 새에게 시신을 맡기는 장례풍습)되었다.


시가 집을 잃은 거리에 솟은 아파트와 촘촘한 “방”들 사이에 아직 길을 잃고 헤매는 노래가 있다.


목소리는 시가 되어야 모두의 노래가 된다


  우금치에서 함평에서 금남로에서 부마에서 구로와 미포에서 녹두장군들을 따르던 흔하고 같은 공기 같은 이름을 가진 돌쇠나 똘이나 순이나 덕이의 목소리는 시가 아니고선 쉽게 눈에 띄지 못한다. 사고 팔리기는커녕 그 땀과 눈물에 자라난 곡식을 먹고도 그들의 이름과 사연은 하품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시가 희박하다는 말은 한갓진 타령이 아니라 고통에 찬 신음이다. 어느 용광로에서 결혼을 앞둔 청년이 떨어져 죽고 쇳물에 굳어버렸을 때 제페토의 시 덕분에 흔하고 쓸쓸할 뻔 한 죽음은 세상에 노래되었다.(2010년 한 철강업체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작업 중 용광로에 떨어져 숨졌고. 포털 기사 댓글에 애도와 울분의 공감을 시로 쓰던 댓글시인 제페토의 ”그 쇳물 쓰지 마라 “는 큰 반향을 불렀다. 그 뒤 노래로도, 책으로도 나왔다.)


  하지만 구의역의 죽음과 그 뒤로 이어진 죽음이어선 안 되는 죽음들은 시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노래될 수 없었고 함께 울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넘어야 할 이 힘든 고개마다 가장 여리고 약한 것들의 이야기가 시가 되고 집을 찾아 노래되어야 한다. 배터리가 불타며 재가 된 이주 노동자의 슬픈 여행이 녹아들어 새로운 가락이 나와야 한다.


  거대한 물처럼 꿈쩍 않는 시대의 사람들은 노래를 만나야 파도치고 움직여 낡은 것을 허물고 뒤집어 맑고 새로운 세상을 짓는다. 그 집엔 시가 알을 낳고 기억을 키우고 노래를 나눈다.


  슬픈 뉴스를 보다가 등을 돌리는데 내 아이들이 동시가 뭐냐 묻는다. 동시... 나의 어린 마음과 너의 어린 마음이 함께 노래하는 동시에 노래하는 시... 혼잣말로 얼버무리는데 가만히 작은 손이 나를 쓰다듬는다. 소리가 없는 노래가 있고 그 노래를 낳아준 시가 있다.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한 변온동물이다. 햇볕이나 타인 없이는 죽음을 흉내 내며 온기를 바란다. 노랫소리가

들리면 심부 깊은 곳의 온기를 겨우 꺼내 눈을 뜬다. 노래하는 시는 ‘너도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여기에 있지...’하고 후렴을 부른다. 용기 내어 한 마리 변온동물이 이웃사이에 들어가면 햇볕처럼 기운이 차올라 함께 노래한다. 가사를 모르고 단어를, 음정을 몰라도 잡은 손을 꼭 쥐고 있으면 노래를 하는 것.


- 동면 -


절망도

국지성일 때가 있다.

그러다

장마가 되고

우기로 굳어

가끔의 희망이

눈부셔

눈을 잃는다


감으면

지하수처럼 출렁이는

변온동물의 슬픔이

겨울을

의인화한다

말귀를 모르는 추위처럼

암실에 갇힌 모국어가

부서지면

비상구가 열린다.


피 흘리고 뜯겨진 말들부터

탈출

손 내민 자들은

채찍을 휘둘러

시인이라는

글자를 새긴다.


절망은

때때로

기후가 되었다.


한 마리 변온동물이

잠들고.


2023년의 집 잃은 시와, 2024년 8월 30일 가사노동 후에 침대에 걸터앉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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