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틈 Aug 31. 2024

우아한 유령

W. Bolcom과 아버지, 현과 선


그렇다면 ‘우아한 유령'처럼 살아가야겠군.


  볼컴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이 곡 “우아한 유령”

  3개의 Rag(정해진 선율 위에서 변주하는 재즈 느낌의 곡- 대표적으론 영화 ‘스팅(1973년)’에 나온 The Entertainer)중 한 곡인 이 곡의 선율이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는 널리 알려진 양인모의 멋진 연주 탓도 있겠지만 선율이 복사(Radiation)해낸 감정의 풍경 때문일 것. 선율. 어떤 선을 만들어 점과 점에 불과한 외로운 1차원의 우리를 연결하는 것. 선. 유령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의미인 ”우아한 유령“은 살아있는 유쾌한 유령으로 정답고 그리운 아버지를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로 그린 모습일 것 같다.


(출처: MBC TV예술무대 유튜브 화면 캡쳐, 양인모)





  빛이나 파장도 '선'이라고 부른다. 방사선은 공포이면서 치유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래된 나무와 단단하게 꼬아 만든 동물의 내장 혹은 명주실로 만든 바이올린이나 해금도 선(줄)에서 선(음의 파장)을 만든다. 비로소 한 몸이지 않고 닿지 못하는 것들이 연결된다. 이를테면 아버지.


  닿지 않아도 닿는 음악의 복사는 햇빛과 닮았다. 그 빛을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보이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들리니까. 햇빛의 소리는. 유령처럼.


샤미센, 뱀의 노래와 고양이의 노래


  현악기는 타악기나 관악기에 비해 비교적 탄생 순서가 뒤로 밀리지만 그 힘은 더 크다. 소리를 흉내 내며 인간은 새로운 소리를 창조하고 때론 그 음악에 신을 빌려오기도 했다. 형편과 상황에 따라 재료가 다른 현들.

현이 아닌 울림통도 그렇다. 실제로 일본의 현악기

“샤미센”은 과거에 도쿄 지역에서는 고양이 가죽을 썼고, 오키나와 지역에서는 뱀 가죽을 썼다고 한다. 죽은

고양이의 가죽이 현의 소리를 품고 내는 소리와, 죽은

뱀의 가죽의 소리는 묘하게 다르다. 사람의 노래만 토리(국악의 지역적 차이, 일종의 사투리)가 있는 게 아니다.


  바이올린은 수 백억 원의  가격만으로도 유명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는 이탈리아의 악기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악기를 통칭한다. 장인의

손길이 우선이겠지만. 이 바이올린의 소리를 품고 만들어내는 몸통, 바이올린의 나무도 유명하다. 소빙하기여서 오히려 단단한 북크로아티아의 단풍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혹독한 추위나 바람덕에 낮게 휜 나무를 사람들은 “무릎 꿇은 나무”라 칭하며 명기에 더 이야기를 입혔다. 오로지 신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앙심을 최고로 내세우던 중세 유럽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까? 어떤 이유든 그 나무가 살아온 기후와 세월이 장인의 손길과 만나 음악의 DNA가 된다.


나무와 동물은 죽어 음악이 된다

그 소리는 한 겨울을 버틴 나무의 영혼과

인간의 삶을 보던 고양이와 뱀과 소와 양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


  하지만 빌딩 한 채 값의 바이올린도 1977년 영국 공영방송 BBC의 실험이나 2003년 독일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현대에 생산한 악기와의 비교실험을 통해 바이올린 명인에게도 구분되지 못한 굴욕(?)이 있다고 한다. 애초에 음악이나 악기를 비교한다는 것, 그 발랄한 발상 자체가 조금 유치하다. 크리스마스이브날의 산타 썰매와 최신예 F22랩터 전투기의 속도를 비교하는 느낌. 분자보다 작게 쪼개는 과학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다. 겸손과 겸허!


<진경산수>


눈을 감고

점을 찍는다

이어지는 선들

선들이 그린 풍경으로부터 멀어진다

감았는데 본다고 하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한 편의

진경산수화

찰나를 긴 시간으로 그려 넣고

다시 찰나에 가둔다

좌표와 무게와 방향을 가진

점 하나가 다시 찍힌다.

눈을 뜨고

음악은 종료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오늘날 마음이 가난하고 허기진 사람들은 음악의 선이 아니라 날카로운 주식 그래프 같은 선들에 베인다. 그 전고점과 고점에서 이어지던 선들이 뭉툭한 골무 같은 아버지의 거친 손끝으로 이어진다. 고양이의 눈처럼 갈라진 엄지손톱과 억센 손으로 쇠줄(작업용 와이어)을 휘고 꼬고 잘라내던 억척스러운 팔. 그 팔의 땀에서 나온 밥과 온기와 지붕에서 자라던 나를 키우던 아버지의 노동과 망치질은 내겐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연주였고. 음감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의 삶을 찌르던 날카로운 선들은 겨울 산이 되어 머리에 내려앉았다. 유령 같은 모습. 그 위로 노랗고 붉고 희고 연둣빛인 골무들이 날카롭고 하얀 꼭짓점을 덮는다.


(사진: 김틈, 2023년 1월 설악산, 비선대 가는 길)

사는 건 어렵네요. 아버지.

파편이 된 정의들은

어설프게 모여서 거대한 불의가 되기도 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이나, 하늘 높이 꽉 찬 달이나. 빛나는 깃발에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해요. 봄날 작은 새싹조차도 태양을 향하지만 뿌리는 어둠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밝게 빛나고 당신은 하얗게 바랬지만. 죽음의 뿌리와 삶의 잎은 한 몸이니까요.


 햇빛 한 줌을 손에 쥐어보려 합니다. 옆에 흐르는

음악도 한 줌 쥐어서 섞어봅니다. 아! 우린 유령이었네요.


- 1941년 일본 북해도에서 태어나 전북에서 성장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대구에서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