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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Sep 02. 2024

“늙지 않고 낡아 의자가 되었어.” 가구가 된 음악

에릭 사티, furniture music과 마트 BGM과 라디오

거문고 음악을 마음에 넣으려면 TPO를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고유한 현악기 거문고는 단단한 해죽으로 만든 술대(연주 도구)로 현과 거문고의 몸통을 내려치고 긁고 뜯으며 소리를 만든다. 속이 텅 빈 첼로나 기타와 달리 그 울림의 크기도 약하고 둔탁하게 들릴 때도 있다.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깊이를 알 수 없어 속이 들리지 않는 우물을 바라보는 것 같다. 둔탁해서 까마득히 깊고 그윽하다.’라고 감탄했다.


 4년 동안 심야 시간 음악 DJ를 거문고 연주곡을 선곡하고 소개할 때가 많았다. 음악은 새로운 마음의 우주와 만나는 일이라 들을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를 만날 땐 아이답게 노인을 만날 땐 노인답게 어쩌면 음악마다 그 음악을 듣기 전에 필요한 일종의 TPO(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가 있다는 것.


  거문고로 연주하는 ‘도드리(수연장지곡 : 임금이 오래 살길 바라는 궁중연회 음악)’는 담백한 겨울 동치미처럼, 백김치처럼 삶의 평균 호흡처럼 자극적적이지 않아도 담담하게 모든 이야기를 품고 흐른다. 시간이 갈수록 익어가며 톡 쏘는 탁주처럼 뽀얗기도 하다. 이 곡을 들을 땐 분주한 소음 속이나, 이어폰을 꽂고 바쁜 걸음에서 듣기엔 좋지 않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듣거나, 숲을 거닐며 듣거나, 조명을 켜지 않은 은은한 새벽이나 밤 시간에 가만히 호흡을 느끼며 듣길 권유하곤 했다. 음악은 음악이 머무는 자리를 마련해야 제대로 가슴에 닿는다.


Furniture Music과 에릭 사티(Erik Satie), 삶의 공간에서 기억의 공간으로

(사진 – 에릭사티 출처 : Médiathèque musicale Mahler – Paris)


  심야 음악프로그램의 DJ로 일하며 고른 시그널 음악은 프랑스 음악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Gymnopédies 1번. 음과 음 사이에 듣는 사람의 생각이 검고 짙은 상상력으로 채워질 만큼 밤과 사색, 음악의 여유를 상징하는 느낌이 들어 선택한 오프닝 시그널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에서 유독 ‘공간’ 감을 많이 느끼는 이유는 단순한 리듬과 선율의 구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1917년 Furniture Music을 만들었고 그의 음악은 늘 공간을 이해하려 했다. 익히 알려진 구석진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관객들이 관심을 보이면 되려 ‘관심을 끄라’며 불쾌해했다는 이야기는 ‘괴짜’로만 해석될 부분은 아니다. 음악뿐 아니라 무수한 인생 주변의 소리들은 우리의 삶의 공간을 채우고, 다시 기억의 공간에 정리된다. 법정의 판사석이나 피고인석이 아니라 늘 언제든 앉을 수 있는 안락한 의자처럼 공간 안에 또 하나의 공간이 되려는 음악의 새로운 시도라고도 느껴진다.


  음악은 공간을 채우지만 공간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이 ‘공간’이라는 말은 ‘상황’이라는 말로도 다시 ‘시간’으로도 연결된다. 슬플 때, 기쁠 때, 바쁠 때, 여유로울 때 사람과 그 상황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지금 사람들이 주로 즐기는 손 안의 핸드폰의 스트리밍과 소리와 단절된 인이어(in-ear) 이어폰으로 만나는 음악은 이런 ‘공간’이 거세되었다. 몸이 없는 AI 지능과의 대화처럼 당혹스러운 무공간의 음악들.



  심야 마트 BGM의 무빙워크와 Eye-Level 선반들

(사진-김틈 : 말레이시아 공동체라디오(Community Radio) ‘Rakita’의 스튜디오 입구. 반갑게 금성의 '공테이프'가 있다!)


  24시간 마트가 운영되던 시절, 12시의 마트엔 인구밀도가 너무 낮아 낯설었다. 신선 식품은 닫았고 ‘샵인샵’들은 장막을 둘러 판매가 끝난 오픈한 듯 오픈 안 한듯한 묘한 심야의 마트.  살 수 있는 몇몇 제품들 그것들을 둘러보며 허기진 배와 허기진 지갑을 들고 마트를 걸으면서 머릿속에 들리던 마트 BGM송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재생될 때마다 밤 12시의 마트 풍경과 아날로그 테이프 같은 무빙워크를 뱅뱅 돌던 허기진 마음이 생각난다.


  백화점, 마트의 BGM은 정말 가구나 인테리어처럼 고객들을 겨냥한다. 빠른 리듬으로 소비를 재촉하게 하거나, 알 수 없는 흥겨움과 하이톤의 노래로 지갑 사정을 안심시킨다. 특히 눈높이(eye-Level)의 선반과 이벤트 홀에 마련된 주력 상품들은 BGM의 주인공처럼 마치 K-Pop아이돌의 ‘센터’처럼 음악을 타고 더 주목된다. 아니나 다를까 모 ‘H’ 마트의 브랜드 송은 K-pop의 아버지라 불리는 방시혁 작곡가의 곡이라고 한다. 이런 음악들은 단순하지만 오히려 그게 전략이다. 이른바 입에 감기며 쉽게 부를 수 있고 뇌리에 박히는 ‘후크 송(Hook song)’의 원조. 비가 오면 부침개가 먹고 싶은 연상효과처럼 즐겁게 쇼핑하던 엔도르핀 분비의 기억과 마트 BGM으로 흐르던 브랜드송이 합쳐지면 “자,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쇼핑을 하러 가자...”는 주술사 같은 마케팅의 주문이 들린다.


  가구처럼 신경 쓰이지 않게 편하게 주변을 채우는 노래와 음악은 어쩌면 목적과 의미가 뚜렷한 노래와 음악 소리들보다 더 깊게 스며든다. 군부대에서 때마다 흐르던 군가도 키즈 카페에서 반복 재생되는 동요와 만화 주제가들도 같은 이유. 그리고 그 무의식의 가구들은 이제는 창고와 고추건조실이 된 부모님 댁 내방 아직 놓인 의자에 앉고 싶은 마음처럼 경계심을 허물기에 쉬워진다.


 모질게 이별할 때 카페에서 흐르던 유행가는 이별의 가구가 되었다.


  경험은 인간의 태도를 바꿀 만큼 강렬하다. 냄새는 생존을 위한 경험 중 가장 예민하지만 그 특유의 적응성으로 인해 역치(Threshold)를 넘기지 않는 한 자극이 지속되지 않는다. 소리도 비슷하게 경험되지만 그 기억은 냄새보다는 훨씬 오래가고 연결성이 강하다. 삶의 강렬한 기억의 순간에 흐르던 노래는, 잊히지 않는 계절에 자주 들리던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혀 그 기억과 계절이 아닌 상황에서 들어도 다시 나를 그 기억과 계절로 이끈다. 무더위에 덕수궁 돌담길과 광화문 거리를 걷다 이문세의 ‘옛사랑’과 ‘광화문연가’를 들으면 나는 늦은 가을의 쓸쓸한 이별길이나 외롭고 서러웠던 광화문 광장의 눈발 날리는 밤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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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늙지 않고 낡아>


한 없이 자유롭지 않은 건

당신과 안 어울려.

깊은 그리움은

별빛 정도의 거리에 잘 보이도록 둬

잊지 않을 만큼만 반짝이게.


슬픔의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가슴은 녹아있자

따뜻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면.

슬픔의 봄은 낯설지 않아.


슬픔은 물

생명이고 죽음이고 다시 부활이니

떠나

떠나가면

내 가슴엔 발을 딛지 마


여름처럼 가라앉을 테니까.


나는 늙지 않고 낡아가

몹시도 그리운 탓에


앉지도 못하고

의자가 되었어.

난.


한 없이 당신이기만 한 건

자유로움과 안 어울려


당신은 우두커니 서서

나를

안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의자가 되었어.

우린.

조금은 낡은.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의자가 되었어.

늙지 않고 낡은.

--- 2024년 봄. ---


 라디오 소리를 켜 놓고 그 속에서 나오는 유행가와 뉴스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가구일까? 그녀가 떠나고 나면 나를 눈물에 잠기게 할 가구는 뭘까? 도무지 왜 버리지 않는지 이해 못 할 조잡한 포장마차 플라스틱 빨간 사각 의자일까... 아니면 무릎이 아파 현관에 놔둔 낮은 의자일까? 라디오 소리처럼 익숙한 가구가 된 소리들이 그리워질 사람들의 사이사이 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늙고 낡아 아픈 몸 때문에 세상 모든 게 의자로 보인다는 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시처럼 그 낡은 의자를 바라보며 나는 먼 훗날 나를 그리워할 이들에게 나무로 만든 낡은 라디오로 기억되면 좋겠다... 꿈꾼다.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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