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소리로 너와 나를 나누는 방법
전쟁을 위해 개발된 이어폰 덕분에, 사춘기 자녀와 소통의 전쟁을...
이어폰(Earphone)은 놀랍게도 1차 세계대전 무렵 개발되었다고 한다. 라디오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말소리는 공기를 통해서만 듣던 것을 비로소 '전기'를 통해서 듣기 시작한 그때. 에디슨의 발명으로 우리가 기억하던 시대에도 헤드폰(Headphone, 이어폰도 헤드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이 있었다는 게 낯설다.
폐와 호흡이 성대를 떨고, 그 떨림은 공기를 떨리게 하고, 그 떨림이 울림판에 닿아 전기적 신호를 떨게 한다. 다시 그 전기적 신호가 울림판을 떨게 하고 공기를 통해 인간은 귀로 그 소리를 듣는다. (참고로 라디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진공 상태로 된 3 중창이 스튜디오와 부조정실을 구분한다. 진공 즉 공기가 없으면 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
헤드폰이나 이어폰 모두 스피커라는 전기적 확성장치의 발명 이후에 특별한 쓰임을 위해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군에 납품되었던 기록이나 설명을 들어보면 소리를 듣기 힘든 소음의 환경(전쟁터)이나 이동하거나 다른 행위를 하면서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장치'로서 유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탄생배경과 달리, 듣기 싫은 잔소리나 복잡한 일상의 소리를 차단하고 나만의 감성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타임머신으로서 이어폰, 헤드폰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소니사의 '워크맨'이 만들어낸 풍경. 그때부터는 귀에 꼽힌 이어폰, 헤드폰은 일종의 비협조적 불복종의 상징이거나, 자유분방한 청년의 '지방방송'행위로 기성세대에게 비치기도 했다.
여하튼 가격이 비싼 소니의 워크맨이나 아이와, 파나소닉 같은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겸 라디오!!!) 보다 국산의 마이마이 등을 더 많이 갖고 있기도 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와 철컥하고 멈추는 물리적 버튼의 소리도 레트로의 상징 같다. 오토리버스(Auto Reverse) 기능이 부러웠던 시절! 하지만 기술은 문화의 속도를 능가하기도 한다. 이제 모든 것은 손 안의 스마트폰에 들어와 있으니까.
1980년-90년대 교실에서 마이마이를 한 손에 들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학생들은 늘 학생주임의 압수(?)를 두려워했고. 꼼수로 좋아하는 가수의 곡들을 컴필레이션으로 녹음해 둔 공테이프에 '영어회화 1'이라는 기만적(?) 제목을 붙여두기도 했다. 물론 의심 많은 선생님이 이어폰을 끼고 들어보자~ 하는 순간은 가중 처벌!
소리의 분리, 감정의 분리, 시대의 분리... 독립!
성장은 팽창우주론에 가깝다. 다 크면 부모를 떠나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난다. 살아온 고향을 떠나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이주를 한다. 그 과정은 때론 대견하지만 대부분 아쉽고 서럽다. '나 답겠다.'라고 부모와 대립하는 성장기의 아이들은 대부분 방어를 먼저 준비한다. 그 전투용품의 핵심은 귀에 꼽힌 이어폰, 특히 요즘 Z세대 사춘기의 상징과도 같은 '에어팟(아이폰 계열의 이어폰)'이 아닐까?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순간에도 귀엔 에어팟이 꼽혀있다. 나도 모르게 '내 말 듣고 있니?'라고 묻는 감정엔 의심과 미움이 섞인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에어팟'이라는 갑옷과 방패는 필요하다. 가장 가까울수록, 가장 아프게 상처받을 수 있으니.
사춘기를 혼내는 우리의 사춘기는 어땠을까? 유무선의 차이와 아이폰과 마이마이, 워크맨의 차이였을 뿐 비슷했던 것 같다. 나만의 공간도 드물던(형제와 방을 같이 쓰는 집, 온 식구가 한 방에 지내는 집도 흔했다.) 시절 어쩌면 그 이어폰 속의 음악과 시간은 '내 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랬다. 대학생 형과 힘든 일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와 이야기소리 잔소리를 피해 도망갈 수 있는 내 방,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서태지의 방, 댐 양키즈의 방, 비틀스와 퀸의 방... 이문세의 방, 최용준의 방(아마도 그건!)... 그 방에 들어서면 나는 나 혼자일 수 있었고 나만의 방식으로 내 아픔을 이겨낼 궁리를 할 수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불안하고 폭발할 것 같은 나의 시간을 공간을 누군가에게 검사받을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
라붐 영화 속에서 소피마르소에게 씌워주는 헤드폰은 그렇게 사랑의 공간으로 그녀를 데려온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소리도 마찬가지 기세야 기세!
이렇게 고백하듯 이어폰의 공간, 내 방을 그리고 나니 이어폰을 꽂고 있는 사춘기 아이에게 집중을 요구했던 나의 공격적 개방지향이 미안하다. 어쩌면 소리는 신분을 사회적 존재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도 지하와 지상의 공간이 계층이나 경험을 나누고 냄새가 (추후엔 그 냄새가 그 경계를 허무는 폭발기제가 되지만...) 구분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소리환경과 그렇지 못한 소리환경도 계급적으로 존재한다. 워크맨과 마이마이의 차이를 뛰어넘는 근무환경과 가족의 대화소리 거주공간도 마찬가지다. ('소리의 자본주의'편에서 다룰 예정) 영화 기생충에서도 반지하의 송강호네 가족의 거주공간과 이선균의 저택 거주공간의 소리는 다르다. 공간이 달라서 소리가 다르다는 의미보다는 더 사회적이고 지리적인 맥락이 작용한다. 그리고 앞서의 글들에서 이야기한 '소리의 뼈'로서의 노래와 선율의 강력함... 송강호의 아들 딸은 이 부잣집을 공략하기 위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로 그들이 칠 사기의 원천이 될 정보를 새긴다. 잊히지 않게. 그래야 '기세' 있게 밀어붙일 수 있으니...
이어폰은 이어도일지도 몰라. 이어도 사나~
제주 민요 이어도는 슬픈 노래다. 바닷일을 나간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면 깊이가 얕은 암초인 이어도는 풍랑에서는 육지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희망이지만 막상 희망일 수 없는 이어도. 그러면서 죽어서 갈 수 있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비현실의 땅. 이어도 사나~ 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소통은 이어도 같다.
어쩌면 사춘기 자녀와의 소통뿐 아니라 유래 없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인간세계에서는 소통은 이어도와 같다. 그런데 더 힘든 이어도다.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니... 아이는 오늘도 이어폰을 꽂고 거리의 많은 사람들 출근길의 사람들도 모두 이어폰을 꽂는다. 귀를 접어 닫을 수 없고 방어할 수 없는 청각을 일단 방어한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나의 세계로 내 마음을 보내고 내 몸은 투쟁과 다툼과 피곤과 만원 지하철 버스에 밀어 넣는다. 그들의 마음은 이어도 바다 위를 출렁이고 있다. 소통하고 싶지만 소통하기 싫은 이중성의 섬. 그들이 이어도라는 섬 아닐까? 그립지만 만나면 피곤하기도 한. 그래서 나도 이어폰을 꽂고 이제 집으로 향한다. 이젠 알겠다. 이어폰은 단절이나 고립이 아니라. 최소한 당신을 내 방에 들이기 위한 공간확보, 내 방의 확보라는 걸...
이제 사춘기 아이와 대화할 땐 '이어폰은 좀 빼고 이야기하지?'라고 말하는 대신 면전에서 전화를 걸어 이어폰으로 통화하듯 대화를 해야겠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디지털 이어도에서 내가 아빠로 살아남는,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그나저나 우리 부모 속 썩였을 그 마이마이는 아직도 어머니집 창고 어딘가에서 먼지를 덮고 있을까? 그 안에 꼽힌 테이프엔 어떤 마음이 아직도 리버스 되고 있을까? 낯설게도 제주민요 이어도사나 혹은 아외기소리나 용천검이 흥겹게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