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잔소릴 용서하지 않겠다!
판소리와 잔소리
판소리 공연은 관객도 함께 극을 완성해 가는 입체적 예술이다. 소리꾼의 이야기와 노래는 고수와 객석의 추임새를 딛고 무대를 3D로 가로지른다. 하지만 그 추임새나 이른바 “리액션“은 공연과 그 소리의 맥락을 이해한 자의 몫,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그렇지! 아믄~!“ 이라고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어디서 잔소리여!? 하는 꾸지람을 듣는다.
“거 잔소리... 참 거시기 하게 맥락 없어 분다이~.”
잔소리는 사전에서는 쓸데없는 소리, 필요이상의 꾸지람이라고 정의한다. 소리판의 사례처럼 너와 나의
맥락(Context)을 벗어난 오해 유발요인이 된다. 하지만 잔소리하는 사람의 마음은 차마 더는 세게 소리를 내지 못하니 메인 메뉴는 못 꺼내고 식전 후 간식처럼 본심의 주변만 잘라서 듣는 이의 주변으로 보낸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보내는 그 본심의 큰 뜻은 결국 소소한 잔소리로 변환되어 나가니 큰 뜻임을 알릴 방법이 없다. 잔소리는 잔소리일 뿐. 본심이 사랑이라면... 그저 사랑한다고 하면 된다!
잔소리 메뉴판! 부가세 포함!
곧 명절이다. 추석 차례상에 모인 대가족들... 어느새 더 자란 꼬맹이들과 입시생들과 대학생 취준생과 노처녀 노총각들이 모인다.
반가운 인사 뒤에 서로 나이와 삶의 처지가 비슷한 끼리끼리 방 하나를 진지삼아 경계와 탐색전을 시작한다. 가장 연장자 할머니는 호시탐탐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한 마디 할 대상을 물색하신다... 불안에 떠는 엄마 아빠의 시선엔 썩소 위장막을 치고 핸드폰 뒤로 엄폐한 녀석들이 보인다.
“그래... 엄마 아빠 닮았으니(혹은 닮지 않았으니) 공부 열심히 해서 일류대학 가야지?... 넌 살 좀 빼야겠다. 그래야 좋은 신랑감 구하지!(앗 어머니!!! 안돼~~~!) 어이구 인물 좋은 우리 손주! 고시든 대기업이든 뭐든 못할까... 이쁜 여자들이 줄 설거야!!(오마니...오마이...갓!)“
사색이 된 부모님들과 “어쩔” 표정으로 마음이
상해버린 녀석들... 어릴 때와 달리 맛난 음식도 근처 슈퍼에 가자는 꼬드김도 얼음장이 된 녀석들을 되돌릴 수 없다. 아... 큰소리를 부르는 잔소리여... 도대체 이
잔소리는 어디에서 시작된 악습일까...? 오죽하면 요즘은 잔소리 메뉴판이 떠돈다. 한 블로그에 올라온 잔소리 메뉴판을 보니. 입을 열려던 어른들 입과 지갑을 닫게 만든다. 확실히... 비싸긴 하다! 그래도 그 값은
제대로 할 것 같다.
잔소리, 정소리, 그리운 소리
듣기도 싫고 비싸기도 한 이 잔소리는 일상의 소리 중엔 최악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류의 데시벨(db:음량)이 크지 않은 소리들은 신경은 좀 거슬리지만 사실 건강한 긴장과 일종의 최면효과도 준다. 마트에서 틀어놓은 배경음악(BGM)이 심리학적으론 쇼핑 행동과 패턴을 유지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내일 주제를 미리 예고...^^;) 길조심 차조심 사람조심의 잔소리는 멍하게 의식을 놓고 위험지대를 걷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재생되는 일종의 경고음 역할도 한다. 물론 100만 번 중에 한두 번 통하겠지만...
나이가 들고 부모가 노쇠해지면 잔소리도 늙는다. 소리의 힘도 약하지만 잔소리의 가짓수도 한정되고 그 횟수도 준다. 그렇게 싫던 잔소리가 그리워지고 아쉬워진다. 이젠 챙김 받기보다는 챙겨줘야 할 것들 투성이인 중년을 지나며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인 잔소리를 꺼내 들으며 자꾸만 아이처럼 운다. 속상해서가 아니라 그리워서...
큰소리 못하고 잔소리하던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 뒤에 잔소리가 얼마나 정 넘치는 소리였는지 알게 된다(물론 위의 메뉴판 잔소리는 금기!!).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들을 주저앉아 울게 만드는 기억도 일상의 잔소리들이다.
잔소리들(번역)
“제발 좀 따뜻하게 입고 다녀!“(아프지 마, 사랑해)
“술 좀 줄여!!“(아프지 마, 사랑해)
“그만 놀고 공부 좀 하지?”(사랑하는 거 알지?)
“또 밤새고 늦잠 뭐 되려고 그래?!“(어떻든 널 사랑해)
“깨끗이 방좀 치워라!!“(그래도 널 사랑해)
“나 없음 어쩌려고 그러냐...”(영원히 사랑해)
잔소리를 할 때마다 미안하다. 하지만 미안해도 나중에 덜 그립고 힘내라고... 초록이들에게 주는 고약한 거름처럼 단단해지라고 쇠에 주는 망치처럼 하루 한 뼘 커가는 성장통으로 잔소리를 건넨다. 물론 잔소리 가득 “암쏘리!” 마음도 숨겨 건넨다.
- 잔소리하다가 지쳐 내가 들은 잔소리를 떠올려보다... 눈앞이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