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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Aug 22. 2021

가난에 지지않는 사람이 될게요

교실일지

희주    

                        -이창훈



         

학기 초 첫 상담기초자료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만 달랑 적었던 아이

부모님 뭐 하시니?   

  

그냥 일해요

고개 푹 숙이고 숨죽인 아이

어떤 일?   

  

꼭 아셔야만 하나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불쾌한 얼굴 겸연쩍은 아이

     

그 후 늘 지각하고 눈 안 마주치고

밥 먹듯 자습 빠지고 등록금도 세 분기나 밀리고

행정실 독촉장을 내밀며 부모님께 갖다드려라 전하면

그늘진 눈빛 대답을 안 하던 아이 

    

시 감상글 발표 수행평가로 제시한 스무 편의 시들 중

아름답게 서글픈 장석남과 최영미의 이별의 시도

아픈 역사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선 굵은 고은과 김지하의 시도

매혹적인 리듬에 자아 성찰과 사랑을 잘 실은 정호승과 류시화의 시도 아닌 

    

석탄 캐는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던

오래 전 사북의 어린아이 마음을 다룬 아픈 시

임길택의 「거울 앞에 서서」를 선택했던 아이  

   

내겐 하지도 못한

마석 가구공단에서 왼 손목을 잃은 아버지와 

농협 옆 하나로 마트 계산대에 늘 서 있는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과 사랑을, 거기에 늘 틱틱대기만 하는 엇박자인

못난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처를 반 친구들에게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누구보다 당당하게 얘기했던 아이

듣는 우리를 오히려 울컥하게 했던 아이 

    

졸업식이 있던 날 교무실 쓸쓸한 책상 위

'고맙습니다!  

가난에 지지 않는 사람이 될게요!'로 시작하는 편지 한 통

임길택의 『탄광마을 아이들』시집 첫머리에 

또박또박 새겨놓고 사라져 버린 아이 

    

남들 모두 대학에 갈 때 가지 않고 집에 쓸쓸하게 남은 아이, 남아

'000 두 마리 치킨' 글씨가 선명한 하얀 조리모 쓴 엄마와 의수에

하얀 장갑을 낀 아빠 곁에서 매일 뜨겁게

끓는 기름에 우리밀을 씌운 닭을 튀겨내는 아이 

    

500cc 차가운 맥주 넉 잔을 거뜬하게 들고는

짓궃은 술손님의 농지거리도 거뜬히 받으며

좁은 홀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아이 

    

못 간, 아니 안 간 대학에서보다

더 진짜배기 공부를

온 몸으로 꿋꿋하게 하는 아이 

    

나날이 어두워 가는 교실을 뒤로 하고

삶도 수업도 팍팍하다 느낄 때면

시원한 맥주처럼 언제든 생각나는 아이

발길을 꼭 그리로 오게 하는 아이   

  

말없이 허름한 의자에 앉으면

말없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뽀글뽀글 기포가 꽃피는 맥주 한 잔

세상 가장 환한 웃음 들고 오는

정말 가난에도 지지 않는

     

꽃이파리 같은

풀뿌리 같은 






제가 첫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제 일터이자 제 배움의 장인 학교는 농어촌 지역에 있었고, 

집값부터 모든 생활물가가 높은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위세에 밀리고 밀려온 

사람들이 간신히 터를 잡곤 했던 곳이었다. 


43명의 아이들 중에 가난과 부모의 불화로 인해 

상처받는 아이들이 유독 많았었고, 담임추천이란 이름으로 가난을 증명하는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1분기 제 담임업무의 아주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만났던 한 어린 벗이 바로 위 시의 주인공 '0주'였다.

임길택 선생의 시집은 이미 여러 권 갖고 있었지만, 

이 친구가 졸업식 날 건넨 단 한 권의

유일한 '탄광마을 아이들'은 아직도 내 서재의 가장 눈에 띄는 공간에서 나를 보곤 한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람들과 스치고 만나고 헤어졌고 다시 만났다.


학교는 이제 풍요로워진 세상 덕분인지 

더 이상 '가난'의 문제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듯하다.

실제 세상의 허울좋은 풍요가 아이들의 외면적 풍요로 이어진 건 분명해 보인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나름 자부하지만


학교가 '가난'에서 멀어졌듯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정신에 끼어드는 기름끼를 느끼며

나 역시 진짜 '선생'에서 많이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저 오래 전

상처와 고통 속에서 아름다웠던 어린 벗들을 생각하곤 한다.




[사진출처]: Pixabay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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