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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May 20. 2021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 브런치로 읽는 일용할 양詩(가족) --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서홍관



어느 해 늦가을 어머니께서는

평생 처음 써보신 편지를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자식에게 보내셨지요.


서툰 연필 글씨로

맨 앞에 쓰신 말씀이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국민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셨지만

어찌어찌 익히신 국문으로

"밥은 잘 먹느냐"

"하숙집 찬은 입에 잘 맞느냐"

"잠자리는 춥지 않느냐"


저는 그만 가슴이 뭉클하여

"만이" 웃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그해 가을처럼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하숙집 옮겨 다니다가

잃어버린 편지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릴없이 바쁘던 대학 시절,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때까지

책갈피에 끼워두고

답장도 못 해드렸던 어머님의 편지를.





“굶는 과 왜 가려고?”

배치표를 보며 법대 진학을 권하는 선생님에게 ‘국문과’를 가겠다고 하면 던져지던 조롱섞인 반문. 

말은 안 하셨지만 어머니 역시 내심 법대로 가서 번듯한 출세를 기대하는 눈치셨고, 맘에도 없는 ‘국어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진심 아닌 거짓말을 하며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국문학과에 등록을 해버렸습니다.      


섬에서 뭍(육지)으로 큰 공부?(대학) 한다고 커다란 배낭가방 두 개에 이것저것 우겨넣은 사철 옷가지며 책들... 바리바리 싸들고 나선 상경길. 

아무도 배웅오지 않는 김포공항의 쓸쓸하던 출구, 바짝 긴장한 얼굴로 노선도를 자꾸 들여다보며 갈아타고 갈아탔던 멀고 먼 지하철의 꾸불꾸불한 여정, 끙끙거리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 처음 들어섰던 회기동의 하숙방. 

어떻게 잠들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는 첫날 밤을 거쳐 신입생 OT다 환영회다 그리고 연일 이어지던 저녁의 부산하고 분주했던 과모임(들). 

화려하고 거대한 서울의 어지러운 네온사인 아래. 그저 어리숙한 지방 촌놈이었던 저는, 지극히 낯선 풍경과 일상에 적응하느라 저 먼 섬의 작은 흔적조차 떠올리지 못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개월 즈음 지났을까요. 유선전화든 편지든 통 연락없는 아들이 원망스럽기는 커녕 얼마나 걱정스러우셨으면... 흰 편지봉투에 낯익은 아니 낯선 이름(대개의 옛 어머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하기 보다 그저 엄마로 존재했었기에)이 새겨진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 어머님의 손편지를 보고 '만이' 웃지를 못했습니다 -



그저 딸이고 여자이기에 큰 오라버니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당신께서, 그토록 졸업하기를 열망했던 '국민학교'. 천신만고 끝에 따낸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나의 어머니의 손편지. 띄어쓰기와 맟춤법이 제멋대로인 그 글을 보며 저 역시 '만이' 웃지를 못했습니다. '만이' 울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하숙방에서 형광등은 꺼놓은 채... 짐승처럼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시는 결코 어렵고 난해한 단어로 멋진 상념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 속의 어머님, 저 먼 섬에 계신 제 어머님,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어머님들의 가슴뭉클한 사랑의 마음은 그저 이렇게 단순하고 투박합니다. 온통 맞춤법이 엉망인 문장이었지만, 그 편지의 문장들은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 그 자체였습니다. 점점 복잡해지고 거대해지고 정교해지는 세상, 그런 세련된 세상의 문법으로 어찌 그 사랑을 감히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철부지 아들인 저는, 먼 섬에서 파랑치는 파도를 보며 늘상 제 걱정이신 어머님께 손편지 한 장 제대로 써보지 못했습니다. 뭐 그리 어렵다고 따스한 마음결 담은 글 한 편 써서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불효의 역사를 끝내려, 저물 무렵 저는 꾸깃꾸깃해진 그 오래 전의 편지를 펴놓고 있습니다. 

울음은 잠시 멈추고 차분하게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 쓰고 있습니다. 


편지를 다 쓴 후 오늘 밤에는 

점점 허리가 구부러지면서도, 못난 자식이 걱정할까봐 아프다는 말씀조차 안 하시는 

'옴마'에게 전화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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