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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May 22. 2021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 브런치로 읽는 일용할 양詩(도시) --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 노인은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하철이 지옥철이 되는 풍경은, 숨이 턱 막힐만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숫자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부대낌 때문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지옥처럼 여기며 홀로 침묵 속에서 어두워 가는 모습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반쯤 감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감았다 하며, 표준화된 스마트폰의 네모난 세계에 얼굴을 폭 파묻은 채 덜컹거리며 어딘가로 실려가는... 무미건조한 그 무표정의 세계.   

   

  그럼으로 지하철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세계의 은유(메타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속도와 효율만이 지배적인 가치가 되어버린 세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이윤창출을 위해 고단한 몸뚱아리를 실어야만 하는 자본의 세상. 무수한 타인과 끊임없이 부대끼고 마주치지만 누구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은 고독한 존재들의 세계. 느낌표와 물음표가 사라진 단절과 고독의 어둠 속 세상. 

     

-- 지하철 내부의 모습 --

  

  그 지하철이 잠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와~ '눈 온다', '눈 온다'... 여기저기서 나지막히 저마다 저도 모르게 내뱉는 탄식. 그 순간 번지는 감탄의 물결. 

  한강 위로... 지하철 밖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눈이 꽉 다문 사람들의 입을 열게 합니다. 시무룩하던 남녀의 얼굴을 서로 마주보게 합니다. 잠든 자의 무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핸드폰의 번호를 눌러 누군가에게 이 소식(눈이 온다는 이 놀라운 뉴스)을 전하게 합니다. 눈 오는 바깥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게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지하철 안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들여오게 합니다.

  무채색으로 일관된 무표정한 세계에 잔잔한 미소가 아로새겨지는 순간이 도래합니다. 마음 속 깊이 간직했던 감동의 느낌표가 소통의 기적을 이루는 순간은 그 얼마나 흐뭇한가요. 

     

  그 기적의 순간을 시인은 '고마운 일'이라고... 정말 고맙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적의 아름다움을 포착해서 이토록 쉬운 언어로 써 준 시인이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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