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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Sep 21. 2023

이재무의 '길 위의 식사'

이 별에서 떠도는 삶의 시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이른 아침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마주치는 아이들

교복을 입고 허겁지겁 선 채로 

삼각김밥을 먹고 있다.


늦은 밤 야근을 하다 커피를 사러 들른

같은 편의점

몇 년 전에 학교를 졸업한 어린 벗이

알바를 하면서 카운터에 앉아 급히

삼각김밥을 먹고 있다.


학교 앞 24시간 불을 켠 채로 서 있는 편의점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가 만났고 내가 만나는 

어린 벗들은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을 

속성으로 데우는 전자렌지에 돌리고 있다.


오래 전

끊임없이 바람부는 먼 섬을 떠나 나 역시

너나없이 바쁘고 분주한 대도시 서울로 온 이후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급히 때우는 식사를 시시때때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이 메는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먹어 치우던 온갖 인스턴트 음식, 음식들.


가끔 사발에 담긴 둥근 밥이 그리워

자취를 하는 동네의 시장에서 

'이모'로 불리는 식당의 단골이 되어 보기도 했다.

요일마다 다르게 나오는 가정식 국과 다 먹으면 다시 더 퍼 주는 고봉밥,

먼 외지에서 온 고학생의 시린 마음마저 품어주던 

주인 아주머니의 밥상은 푸근하고 따스했지만... 그럼에도

울컥하고 '몸 안쪽에서 비릿하'게 치밀어 올라오는 설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제는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곳, 그 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손수 지어낸 밥이 담긴 둥근 사발,

개다리 밥상 주변으로

두런두런 둘러 앉아 가끔씩 나오던 계란 후라이의 양을 

눈대중으로 흘겨보며 분주히 젓가릭질하던

나어린 누이들과 코흘리개의 나.  

그 가난했던 시절의 식구들.


말은 없어도 비좁은 밥상에 올망졸망 앉아

막 끓고 있는 찌개가 담긴 투거리에  

함께 숟가락을 휘젓던 그 시간

함께 가난함을 공평히 견디던 시절의 

어떤 눈물겨운 따스함이

이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에 가 버린 것만 같아

지독한 허기처럼 설움은 그렇게 불쑥불쑥 북받쳤던 것이다.


겉으로는 풍요로워지고 화려해진

우리네 삶이 실은 얼마나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빈약해졌는가를 

역설적으로

오래된 과거의 가난했던 풍경들 속에 

얼마나 빛나는 순금들이 가득했었는지를

함께 밥을 먹는 존재들의 그

곁에 있다는 든든함에 대해 

이 시는 아프게 반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이 몸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기도 전에

입으로 퍼 넣는 그런 쓸쓸한 식사 말고

오늘 저녁은 집에 일찍 들어가 김치찌개를 끓이고

식구들과 느리고 더디게 숟가락질을 해 볼 생각이다.


온 몸에 피가 돌며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포만감에 젖은 오래 전의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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