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감치 그림일기 3
1.
연말이 다가오면 우리 동네에는 동네를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를 한다. 전시에 걸었던 그림 둘이 있다. 첫 번째 그림은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 아래 굴다리를 주제로 삼았다. 굴다리는 묘하게 푸근하다. 여기도 내가 자주 지나는 걸음길이다. 굴다리를 지나 길게 이어진 경사길을 오르면 외국에서 온 승려들이 모여 사는 나름 유명한 절이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점심 한번 얻어먹으러 갔다가 줄 선 사람들을 보고는 발을 돌렸던 기억 대신, 절 아래 개울에서 몇 번 삼겹살을 구웠던 기억이 달콤하게 떠올랐다. ‘절 아래에서 삼겹살이라니, 소갈머리 하고는.’ 물론 오래전 일이다. 하여간 이 길 또한 동네사람들이 열심히 걷는 산책길이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선생님이 소리 없이 다가와서는 철로 위 전선과 선로 아래 흐른 녹자국을 더 자세하게 묘사하라고 타박을 하고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소인은 팔이 없나 봅니다. 그리 그리지 못하는 걸 보니!’
이런 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으나 소리 없이 삼켜버렸다. 그럭저럭 끄적이다 벽 아래 나무를 뭉게구름처럼 뭉개면서 ‘나무는 어렵다!’를 외치고 있을 때, 다시 소리 없이 다가온 선생님이 붓을 뺏는다. 조금씩 나무가 살아난다.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어어! 어두운 굴다리 천정까지 순식간에 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 부분은 ‘어떻게 처리하면 빛날까, 어떤 색으로 굴다리를 멋지게 살려낼까’ 고민하던 차였다. 마치 맛있게 먹으려고 미뤄놓은 닭다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때 다짐했다. 다시는 선생님께 닭다리, 아니 붓을 뺏기지 않으리!
2.
후후, 일취월장이라는 자뻑 멘트. 두 번째 그림은 첫 번째 자리에서 90도 북쪽을 보고 찍은 사진을 주제로 삼았다. 아파트와 시골마을이 사이좋게 겹쳐있고 하늘에 낮달이 조화롭다. (두 번째 자뻑 멘트!) 우리 동네이다. 완성하고는 무척 뿌듯했던 그림. 근경에도 겨울 논을 비롯해 이것저것 많이 그려 넣었으나 어느 순간 돌아보니 깨끗하게 뭉개져 있었다. 역시 선생님의 짓이다. 그러나 그림은 훨씬 격이 높아져 있다. 그럼에도 붓은, 아니 닭다리는 뺏기지 않기로 한다.
우리 동네에는 유명 육상스타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 가끔 뉴스에도 얼굴이 나오는 중장거리 스타였다. 이후 타 지역의 체고로 진학했고 지금은 실업팀 소속으로 기억한다. 2~3년 전이었다. 설날 아침에 나는 분연히 일어나 운동화를 신고 동네에 나섰다.
달린다고는 하지만 남들이 보면 뛰는지, 걷는지, 구르는지, 잘 구별할 수 없는 묘한 이동방법을 구사한다. 전날 과했던 술을 액체 상태로 직접 배출하기 위한 부득불 방안이었다. 그림에 보이는 오르막길을 힘겹게 등반하고 있는데 그림 왼쪽 첫 번째 집에서 여학생 하나가 나섰다. 가벼운 운동복에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통~토옹! 마치 균형 잡힌 스프링 둘이 탄력을 이용해 가볍게 튀어 오르는 형세이다. 달리 말하면 운동화 바닥이 더러워질 새라 땅에 닿기 전에 공기가 신발을 밀쳐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 것이 달리기라면 그의 것은 손오공이 근두운에 올라타는 일이었고, 그의 것이 달리기라면 나는 대왕달팽이의 횡단이었다. 그렇게 그가 지나가고서 깨달았다. 그가 그 육상선수였다는 것을. 지나고 깨우쳤다. 설날 아침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는 것을. 후회했다. 반갑다고 인사라도 건넬 것을. 돌아보니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