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감치 그림일기 1
1.
그림일기는 사전적으로야 그림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고된 숙제로만 기억에 남아있다. 어릴 때는 그랬다. 반면 이제 쓰려는 그림일기는 일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림을 주목한다. 또 일기라고는 하지만 또한 절대 매일 쓰지는 않을 작정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핑계로 이런저런, 그냥 사는 얘기나 해보려는 수작이다. 더불어 일기를 쓴다고 스스로 어르면 그림 그리는 일에 덜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50대 중반을 지나는 인간 수컷 글쟁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런 거친 단어를 동원한 이유는 동네 문화강좌를 채우는 구성원 대부분이 은퇴 연령을 넘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이 나이대의 남자가 참여하려면 적잖이 뻘쭘한 분위기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도시 분위기가 이럴진대 대도시는 더할까, 덜할까?
대부분 강좌가 낮시간대에 편성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남성이나 젊은 층의 참여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나이 든 남자들이 배움에 인색하게 변해버린 탓도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는 방귀 좀 뀐다는 자만이 원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뭐든 오래 하면 잘해야지, 그걸로 냄새나는 자만까지? 이 옹색한 자만이 나이 들어 새로운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많은 남자들이 나이 든 쫄보로 살다가 과거에 묻혀 죽는다’고 단정하면 많은 남자들이 화를 낼 터이니, 화라도 내자. 나 또한 1%도 다르지 않은 나이 든 남자이기에 화가 난다.
2.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화가인 酒友2가 운영하던 서양화 문화강좌에 수강생들이 대폭 준 것이다. 당연하기도 했겠지, 팬데믹인데. 그래서 ‘나도 나가지, 뭐’ 이런 객기가 있었다. 술자리 대화였으니 자연스레 까먹을 만도 한데 희한하게도 안 까먹고 등록을 했다.
열심히 배우고 또한 열심히 그려 시각예술로 자아를 실현할 생각보다는, 그림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는 순간 주우2로 변신해 술자리에 마주하는 극적인 장면을 더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어 달 동안 4B연필로 망치질과 대패질을 반복했고(그만큼 팔이 아프다는 뜻) 다시 지우개를 쥐고 도리깨질을 했다. 두 달이래 봤자, 일주일에 한 번이니 7~8회 정도일진대 무엇 못잖은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런 관계로 선생님에게 투정과 강짜를 일삼는 나쁜 학생으로 변해갔다.
“선생님! 배고파요.”
~“사모님이 밥 안 줘요?”
“선생님! 왼손으로 그려보세요.”
~“그건 피카소도 안 돼요. 조용히 하고 그림 그려요.”
“선생님! 왜 이혼했어요?”
~“………!!”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다 드디어 수채화로 갈아탔다. 수채화는 물감을 팔레트에 짜 말려두면 오래 사용한다. 대신 수채화 전용종이가 꽤 값이 나간다. 그래도 괜찮다. 스케치북 한 권 다 그리는 일 또한 고난의 시간만큼 길 테니까.
첫 그림은 사진잡지를 뒤적이다 발견한 마을 풍경을 그린 것이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스케치하고 용감하게 채색에 들어갔다. 다 그리고 바라보는 자신의 그림은 가슴을 꽉 채울 만큼 뿌듯함을 준다. 감동이 넘치는 순간에 맞춰 선생님이 다가와 한마디 하고는 총총 사라진다.
“도화지 한 장을 꽉 채워보는 일도 좋은 경험이에요.”
한 장의 그림에 정녕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