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감치 그림일기 2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더 뻔질나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소재를 찾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2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을 안 쓰던 탓에, 아니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내 탓에 나는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다녔다. 스마트폰은 찍는 듯 안 찍는 듯 잽싸게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큼직한 카메라를 들이미는 일은 ‘나 지금 너 찍는다!’ 이렇게 동네방네 외치는 일이었다. 과정이 더디고 거칠었다.
두 번째라 기억하는 이 그림은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길을 그린 것이다. 그리는 일이 가진 매력은 현실에 있는 것들을 빼고, 없는 것을 넣거나, 내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진에는 더 많은 것이 있지만 빼고 넣고 바꾸었다.
이 길은 학교와 동네를 잇는 2백 미터 정도의 지름길로 논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겹게 지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정겹게 담배를 피우며 걷는 학생들을 위해서도 천혜의 환경이다. 공기도 깨끗한 데다가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를 가지고 있어 사주경계가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00고 전용 정신건강 끽연길’이라 이름 지었고, 나만 알고 있다가 10년 만에 처음 공개한다.
나도 고등학교 때 담배를 배웠다. 뭐 어렵게 갈고닦아야 할 학문도 아닌데 유독 담배에는 ‘배운다’는 단어를 썼다. 40년 전의 일이다, 한 갑에 40 원하는 ‘청자’를 입에 물려주고는 매운 연기에 기침을 하는 후배를 위해 냉수컵까지 준비해 ‘열심히’ 가르치던 무지한 선배들이 있었다. 담배를 성인이 되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주민증으로 생각했던 것인지, 성인이 되면 슬슬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고 배려했던 것인지, 사는 일이 이렇게 씁쓸할진대 과한 건강으로 오래 살 필요 없다는 가학적 가르침이었는지. 그로부터 30년을 피웠고 10년 전, 힘들게 배운 일을 어렵사리 끊었다. 배워서 후회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악질 축에 드는 것이 담배다.
그 옛날에도 학교는 좀 지옥 같은 곳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서울 도심에 있는 기독교재단 학교였음에도, 아침을 흐르는 코피로 시작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밤샘 공부 때문이 아니다. 지각생을 위한 안수기도 정도로 생각했는지 교감선생의 따귀는 매서웠다. 멋지게 생긴 국어선생도 수시로 쪼인트를 깠다. 그러니 학생들끼리는 뒤질세라 싸웠고 서클들은 폭력 대항전을 펼쳤다. 하이라이트는 체육선생과 교련선생 들이다.
공수부대 출신임을 자랑하고 다녔던 두 체육선생의 폭력은 입에 올리기도 싫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기억나는 것은 올챙이포복이다. 이것은 양손을 등 뒤로 부여잡고 바닥을 기는 가학행위이다. 실내체육관 바닥이 더러워지면 마침 체육시간인 반은 꼬투리를 잡혀 체육관 바닥을 올챙이처럼 기어 다녔다. 체육관 바닥이 깨끗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교련시간에 받은 얼차려들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이후 실제 군대에 가서도 해보지 못한 진귀한 것들이었다. 일렬로 서 엎드려 푸시업 자세를 한다. 그리고 뒷사람 어깨에 두 다리를 얹는다. 한 반 60여 명이 하나로 이어진 한강철교가 완성된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에 의해 끊긴 한강철교에 대한 은유였을지 모른다. 은유라 하더라도 가장 힘든 은유였다.
김밥말이도 있었다. 학생들은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운동장 바닥에 눕는다. 이로서 긴 김이 완성된 것이다. 그다음 제일 끝 아이가 단무지가 되어 김밥처럼 말아온다. 오른쪽에서 우당탕탕 비명이 쌓이며 다가온다. 굴러오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느꼈음직한 공포이다. 아니 그는 도망이라도 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피자 위에 치즈와 함께 옆길로 샌 이야기도 자꾸 길어진다. 하여간 우리 사회 전반에는 이렇게 폭력의 그림자가 길고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갑자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는지 누군가 묻는 것 같다. 나는 입이 없어 말을 못 한다. 아니 나는 모른다.
그림 그리는 일은 사실 매 순간이 절망이다, 내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대로 절대 그려지지 않고 손은 심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멀리 걷는 두 학생을 묘사할 때는 재미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 없이 삭제했으며, 풀들을 빨갛게 탈바꿈시킬 때까지는 흥미로웠다. 이제 논이다. 아무리 하나하나 벼를 그려도 논 같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꾸적꾸적 된똥을 싸고 있을라치면 선생님이 다가와 붓을 뺏는다. 선생님은 어두운 초록을 만들어 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휑했던 도화지 바닥에 논이 자리 잡았다.
수채화는 수정하기가 어려워 대개 밝은 색부터 어두운 색의 순서로 칠해 나간다. 그리고 그림의 끝자락, 선생님의 붓은 어둠을 다스렸다. 어둠을 다스리자 밝음은 더 밝게, 밝은 색이 더 선명해졌다.
우리도 그럴까? 어둠을 다스려 밝은 곳이 더 밝아지는 것처럼, 어두운 부분을 만지면서 사는 일이 더 나은 길을 찾아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속삭이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