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받고 싶어.”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애정 결핍처럼 보일 수도 있고, 혼자서는 나약하다는 걸 시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말일 수도 있다. 자존감이 특히 낮은 시대, 그래서 오히려 높은 자존감이 추구되는 시대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사랑 없이도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이어야 사랑도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있고, 또 그것은 상당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면의 독립적인 힘을 기르는 것 이전에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일환으로서 자신이 사랑받길 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물론 연애 혹은 결혼으로서의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의 사랑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이름’을 얻기 위한 경쟁이다. 장관이라는 이름, 박사라는 이름, OO동 주민이라는 이름, 전문가라는 이름, 우승자라는 이름. 수많은 영역 안에는 저마다의 위계가 존재하고, 그 위계들은 더 거대하고 넓은 위계 안에서 다시 질서 지워진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높다고 인정되는 이름, 즉 더 존중받고 더 대우받을 수 있는 이름을 얻고자 한다. 존중과 대우 역시 사랑이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름 혹은 자리를 갈망한다. 대개 그런 자리일수록 더 많은 소득이 보장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돈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매우 중요한(때로는 가장 중요한) 위계적 조건 중 하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누리려는 욕망이란 결코 타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과 완벽하게 구분 지어질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상기(上記)한 사회적 지위들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위 같은 종류의 야망이 적은 사람일지라도 일상적 자기 계발에 대한 욕심은 버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갈수록 이 부류의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자기 계발이라는 것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독서를 하는 것, 외모를 꾸미는 것, 운동을 하는 것 등이 모두 나를 계발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이 온전히 자기 자신의 만족과 발전‘만을’ 추구하는 것이란 주장은 사실 기만에 가깝다. 지금보다 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이 언젠가 어떤 상황에서 불특정한 타인들의 눈에 보일 것이며 그에 따라 더 많은 사랑(호감)을 받게 될 자신의 가능적 미래를, 우리는 절대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다(실제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계발을 하는 본인의 모습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자기 계발이 습관이자 의무가 되어버린 수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을 바라고 있는 셈이다.
사랑받길 원하는 존재라는 점에선, 요즈음 매우 흔하게 언급되는 비혼주의자들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이들이 결코 사랑받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사랑을 받으며 살기 위해선 오히려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즉 비혼주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는 것일 뿐, 결코 사람 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의 인생관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듯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을 바란다. 남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받길 원한다는 점이 우리의 삶을 갖은 노력과 불안으로 점철시키는 요인임이 틀림없음에도, 우린 결코 이러한 갈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 역시도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닌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로서의 높은 자존감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남’의 사랑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이 나약하고 부조리한 이상주의자가 바로 인간, 그리고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