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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Oct 12. 2022

어머니

펼친 책장이 어느새 절반을 넘기었습니다

영영 읽지 못할 두께라 여겼건만

누렇게 주름진 시간이 놀랍기만 합니다     


소설이었을까요

수필이었을까요

희곡이었을까요

서정시였을까요

어떤 것도 아닌 모든 것이었을까요

평론가가 외면하는 걸작이었을까요     


왼편에 켜켜이 쌓인

풀 내음, 열차, 스테이크, 산부인과, 포장이사, 석류

오른편에 여태 남은

아직은 빳빳한 안개 숲     


식도염 환자 같은 오 분의 속독 같기도

강박증 학자 같은 오백 년 정독 같기도

데카르트의 악마는 죽지도 않나 봅니다     


남은 거라곤 손에 밴 종이 냄새뿐인 듯해

찢어진 방충망처럼 허무하다 싶다가도

밤하늘 스치듯 빚어낸 쓰디쓴 빛줄기를

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록 푸르게 타오르는

책은 결코 버려지지 않겠지요     


마지막 장 힘겹게 넘기어진 그날이면

어느 신화에도 나온 적 없는 그곳에

그 신비롭고 은밀한 책장 한 칸에

참으로 조심스레 꽂혀 간직될 것입니다     


그렇게 소박한 영원 속에서 영영

가을의 황홀한 붉음처럼 빛 발하겠지요     


후- 하고

심호흡 한 번     


경쾌한 손끝으로 이제,

다음 페이지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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