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친 책장이 어느새 절반을 넘기었습니다
영영 읽지 못할 두께라 여겼건만
누렇게 주름진 시간이 놀랍기만 합니다
소설이었을까요
수필이었을까요
희곡이었을까요
서정시였을까요
어떤 것도 아닌 모든 것이었을까요
평론가가 외면하는 걸작이었을까요
왼편에 켜켜이 쌓인
풀 내음, 열차, 스테이크, 산부인과, 포장이사, 석류
오른편에 여태 남은
아직은 빳빳한 안개 숲
식도염 환자 같은 오 분의 속독 같기도
강박증 학자 같은 오백 년 정독 같기도
데카르트의 악마는 죽지도 않나 봅니다
남은 거라곤 손에 밴 종이 냄새뿐인 듯해
찢어진 방충망처럼 허무하다 싶다가도
밤하늘 스치듯 빚어낸 쓰디쓴 빛줄기를
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록 푸르게 타오르는
책은 결코 버려지지 않겠지요
마지막 장 힘겹게 넘기어진 그날이면
어느 신화에도 나온 적 없는 그곳에
그 신비롭고 은밀한 책장 한 칸에
참으로 조심스레 꽂혀 간직될 것입니다
그렇게 소박한 영원 속에서 영영
가을의 황홀한 붉음처럼 빛 발하겠지요
후- 하고
심호흡 한 번
경쾌한 손끝으로 이제,
다음 페이지를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