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가 잠든 새벽, 숲길은 의외로 편안했다. 촉촉하고도 상큼한 은빛의 오솔길 끝에는 달빛이 앞서 걷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걷는 동안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 벅차하다가 꿈을 깼다.
사춘기에 들어서서는 더 구체적인 꿈을 꿨다. 숲 속의 오솔길은 자주 나타났다. 달빛을 따라 걷다가 올려다본 하얀 달 속엔 내가 좋아하는 헤세와 앞서 간 시인들의 이름이 있었다. 내 가슴에 온통 물들어 있던 그 이름들이…….
어른이 되어선 꿈을 꾸지 않는다. 가끔씩, 시간 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현실 속에서 볼뿐. 그 시간 사이로 흐르는 차갑고 투명한 줄기가 있다. 또 다른 나가 그 위를 걷고 있다. 나는 어린 날 꿈속에서 숲길을 걷던 나와 겹쳐지기도 한다.
나는 내 의식 속으로 들어와 수시로 말을 걸어온다. 그 언어는 사춘기 시절 앞서간 시인들이 들려준 말들처럼 나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가뭄 끝의 단비처럼 오히려 감동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나를 크게 하며 살게 하는 힘이다.
생명을 유지해 간다는 것은 믿음의 힘이 단단하다는 것, 그렇게 단단해진 믿음은 고요한 언어로 내게 낯섦을 선물한다. 그런 낯설게 이어지는 시간 속을 걸으며 나는 순수한 내 언어들을 키워 낸다.
내 지난날 잠깐 사는 것이 고단하여 죽음을 생각한 때 있었다 투명한 캡슐 안에 갇힌 것처럼 알 수 없는 공간에 고립되어 처절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느라 세상이 낯설게만 느껴질 때 짧고 善한 시 한 편이 나를 캡슐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과 같이, 그러므로 나를 살게 한 것과 같이,
-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방 하나 같은, 더운 여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같은, 비 내리는 골목, 작은 소등 같은……. -
‘그런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시를 써야겠다, 따뜻한 마음으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런 생각의 뿌리 깊숙한 곳 그곳엔 '생명의 방'이 있다.
결국 내가 낯설어하거나 세상이 나를 낯설어하는 모든 것들과 나는 한 몸인 것이다. 그것들에 흡수되어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시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의 말보다 침묵의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열광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들려주는 그 많은 언어들. 나의 의식에 들어와 수시로 말을 걸어오는 또 다른 나의 언어들. 그것들이 나에겐 시의 산실이고 모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