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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고 Nov 08. 2016

그 공원과 나만 아는 기억

혼자 맥주를 마신 날


저녁을 먹고 집에 가는 버스에 오르려다 혼자 좀 더 걷고 싶어서 근처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편의점에서 평소 먹고 싶던 맥주 한 캔이랑 츄파춥스 한 개를 사서 공원에 도착.

생각보다 공원은 깜깜해서 그냥 지나가는 아저씨들만 봐도 흠칫 놀라고,

밝은 곳에 앉아 있자니 커플들이 너무 많아 왠지 지는 기분이라 결국 맥주를 반 캔만 마시고 버렸다.


나에게는 역시 사탕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초코맛 사탕을 까서 입에 넣고

터벅터벅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오래된 다리를 나는 몇 번이나 걸었던가, 누구와 걸었던가 생각해보니

어떤 기억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억 하나.

스무 살 때 좋아하던 선배와 내 생일날 함께 그 다리를 걸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기엔 좀 넓고 둘이 지나가기엔 좀 좁은 다리를 함께, 아니 앞뒤로 서서 걸으면서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멈칫 이야기를 어색하게 멈추곤 했지만 그래도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 선배는 사귀자고 했던 전날의 일을 취소하자고 말했고,

그건 대학생활 중 끔찍한 기억 몇 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기억 둘.

친구가 공원에서 고백받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고백받았다는 그 장소에 갈 때마다

마치 내가 본 것처럼 꽤 선명하게 그 기억이 난다.

나는 상대방 남자 얼굴도 모르는데 신기한 일이다.


기억 셋.

친구 기숙사에서 자고 아침에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간밤에 온 비로 연잎에 빗방울이 맺혀 있는 걸 보았다.

그 전날 저녁 숙소가 잠겨서 밤새 문을 두드리던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다음 날 물에 젖은 나무다리와 연잎들을 보며 상쾌하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기억 넷.

그 사람과 만나는 동안 얼마큼 이 공원에 왔었는지 잘은 모르겠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두 번 정도.

지금 여기저기 숨어있는 저 커플들을 보며 나도 커플인 적이 있었다! 고 생각해봤자 부질없다.

나는 지금 혼자니까.


아무리 여러 기억을 꺼내봐도 결국 하나의 기억이 가장 나를 괴롭혔다.

혼자 있는 시간,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 마시는 맥주.

여러 가지를 상상해왔는데 결국 혼자 남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다.

오늘도 네가 떠났으면서 누굴 걱정해, 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역시 내가 잘 되니까 버린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아니 그렇게 생각해서 날 미워해 잘 지내면 좋겠다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마음이 나 자신을 괴롭힌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혼자 하고 싶지 않다.

당신을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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