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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고 Nov 10. 2016

오늘 참 달이 밝네요

도서관에서의 하루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공강 시간이나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구경했다.

이런 내용을 다룬 책도 있구나, 이런 분야의 책들도 이렇게 다양하구나.

한참을 왔다 갔다 하며 책을 살피다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읽어보고,

읽다가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면 금세 다시 갖다 뒀다.


사실 진지하게 책을 읽을 마음이 없었다.


그냥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보면 혹시나 내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도서관은 불안하고 초조한 그 시간들을 버티는 나의 현실 도피처였다.


취직을 위해 공부를 하는 동안 간절히 바랐던 것은 그렇게 한가하게 도서관의 책들을 기웃거리는 일이었다.

시험만 끝나면 꼭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어야지.

핸드폰에도 적어 놓으며 다짐했던 그 일은 시험이 끝나고 반년이 다 돼가는 지금 겨우 두 번 이뤄졌다.


한 번은 너무 더워서 도서관으로 피서를 갔다.

네 시간 동안 다섯 권의 책을 읽었다.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에세이와 시집을 읽은 결과였다.
뭔가 굉장히 뿌듯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낸 느낌?
문제는 그러고 나서 다시 도서관에 가는데 한 계절이 걸렸다는 것이다.

드디어 오늘 다시 도서관에 갔다.


네 시간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었고, 세 권의 책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놨다.

그동안 책장에 가까이 있는 둥근 책상에 혼자 앉아있었는데 한 노년의 여자분이 내 맞은편에 앉으셨다.

안 보는 척, 내 책만 읽었지만 무슨 책을 읽으실지 궁금했다. 

요리나 뜨개질에 관한 책을 읽으시지 않을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피곤하셨는지 맞은편에서 주무시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 틈을 타 앞에 놓인 책들을 엿보니 책상 위에 놓인 책은 '빨간 머리 앤'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편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조용한 숨소리만 내시며 주무시는 노년의 여자분이 왠지 소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곧 멋진 노년의 남자분이 나타나서 '이제 그만 가지'하고 말하셨다.

함께 도서관을 떠나시는 두 분의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한참 후 집에 가려고 밖에 나오니 어둑해진 하늘에 반달이 걸려있었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 읽은 책 속에 내용이 떠올랐다.


여자가 달을 보며 말했다.
"오래전 일본 소설가 하나가 쑥스러웠던지 'I love you'를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번역했대요."
남자는 귀엽다며 웃더니
"오늘 참 달이 밝네"라고 말했다.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오늘 달이 참 밝네요."
                                                                                    - 다시, 사랑  , 정현주


도서관에서 하루 보내기 목표를 마친 나에게 다음 목표가 생겼다.


내가 "오늘 참 달이 밝네요."라고 말하면 

함께 웃으며 "그러게, 오늘 달이 참 밝네."라고 대답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


그 사람과 나이가 지긋이 들었을 때도 함께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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