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존감 위에 얹힌 삶의 무게
꽤 오래전, 10여 년 전쯤에 우연히 꽤 흥미로운 방송을 한 편 본 적이 있다.
호주 방송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타이틀이 <부부 스와핑 (swapping)>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결코 난잡하거나 비도덕적인 내용은 아니었으니 안심하시게.
저예산의 변변찮은 지역 케이블 방송과 같은 느낌의 화질에, 타이틀이 풍기는 냄새까지 더해져,
비도덕적이거나 질이 떨어지는 프로그램 정도 되는가 보다 하고 채널을 돌리려던 참에,
다른 일로 리모컨에서 손을 놓게 되면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시청하게 되었던 것인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나름 신선했다.
지금 기억나는 이 프로그램의 포맷은 대충 이러했다.
자녀가 있는 두 가정을 선정하고,
두 가정의 아내를 바꾸어 한 달간 생활하게 하고 그 과정을 리얼리티로 담아낸 것.
아마도 이 기간 중에는 본래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고 있는 듯했다.
서로 스와핑 되는 아내에게 직업이 있는 경우에는 직장마저도 함께 뒤바꾸어 생활했다.
가정 A.
형편이 매우 어렵다. 남편은 장기 무직 상태로, 낮 시간에는 뭘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외출하여 돌아오지 않았고 가사를 돕는 일도 없었다. 그는 늘 아내에게 고함을 쳤고, 욕을 하거나 물리적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집은 낡고 누추했으며, 집 앞에 세워둔 트레일러에서 가족 중 절반이 생활하고 있었다.
가사를 돌보는 것도, 경제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오는 것도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과도한 노동으로 투박했고 억척스러웠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육체적으로 힘이 든다는 표현은 하면서도, '내 삶은 왜 이런가?' 라던가, '삶을 개선하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남편이 가족을 등한시하는 사이, 아이들도 심리적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잊고 지내는 듯했다. 부모의 노고라든가, 어머니의 고통에 대한 공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집안일을 함께 나눈다거나 고통을 분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마치 생각하는 법 같은 것은 배운 적도 없고, 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듯이, 그저 가방을 들고 학교와 집을 기계처럼 오고 가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 간에 늘 고성이 오고 갔고, 욕은 일상이었다.
가정 B.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드라마 속의 중산층 가정 같은 모습이었다.
남편과 아내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역할 분담이 분명하고 습관화되어있어서, 아내가 부재중일 때도, 남편이 바쁠 때에도
가정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남편은 남녀평등의 개념을 정확히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아내를 존중했고, 퇴근 후에는 함께 많은 대화를 했다.
아이들은 밝았고, 자신의 꿈을 향한 설계도를 그려가며 착실히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가정 A의 아내가 가정 B에서 함께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가정 B의 아내가 가정 A의 집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된다.
서로 가정을 바꾸어 보낸 첫 1주일은 극명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시기였다.
가정 B의 아내는 가정 A에서 상대방의 삶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폭격을 맞은듯한 집 안에서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누구도 그 사실에 감사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몸을 뉘어보지도 못하고, 그녀는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나가야 했다.
그녀는 가정 A의 남편에게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밝히기로 결심한다.
"가정은 구성원이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다 할 때 존속하는 것이다. 이 가정에서 헌신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내 혼자였던 것인가?
어째서 아무도 가사를 돕지 않는 것인가? 왜 함께 하는 시간이 없는 것인가?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아이들은 가정을 등한시하는가?"
등등.
가정 A의 남편은 도피한다.
그는 대화를 기피하고, 만남을 거부하고, 내면으로 숨는다.
그는 에피소드 중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을 만큼 열심히 도망 다녔다.
성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정 B의 아내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가사 노동과 원래의 아내가 해야 했던 고된 경제 활동에 탈진해간다.
가정 A의 아내는 가정 B에서 지내게 된 첫 한주 동안 몸 둘 바를 모른다.
그녀는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이었다.
가사는 세탁기, 청소기, 도우미, 남편 등이 대신해주었고
회사 일은 그저 책상에 앉아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고
누구도 그녀를 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낯선 일이었다.
너무나 익숙했던 안전지대 밖으로 던져지는 순간, 그곳이 낙원이라고 하더라도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불편해하고 당황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그녀는 안절부절, 한시도 편히 쉬지 못했다.
그녀가 지인에게 전화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기 정말 이상한 곳이야.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뭔가 하지 않으면 불똥이 튈 것 같아서 너무 초조한데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여기 남편은 나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어도 괜찮다고 계속 말하는데, 그게 괜찮을 리가 있어?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데 성할 리가 있겠냐고. 불안해 죽겠어. 대체 쉴 땐 뭘 하면 되는 거야?"
2주 차에 들어서면서 가정 A의 아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땅이 꺼지거나 지구가 폭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만할 정도로 즐겼다.
그녀의 방임으로 인해, 그녀가 던져둔 가족으로서의 역할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전가되었지만
가족들은 그것을 수용했다.
주어진 상황들을 짊어지고 갈 노하우들을 하나씩 익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들을 어느 선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어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역할을 주기 시작했고, 가족의 의미, 역할, 그동안 아이들의 엄마가 해왔던 수고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성인으로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남편, 큰 덩치로 도망만 다니는, 세 살짜리 어른을 한 달 안에 성장시킨다는 것, 그를 설득하거나 변화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낯설고 불편한 자유를 하나씩 맛보며 즐기는 여유를 배워가던 가정 A의 아내는 웬일인지 4주 차에 접어들면서 지인에게 전화하여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 생활이 이제 지긋지긋하다."라고 말이다.
(이 장면은 애잔했다. 마치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곧 드레스와 구두가 넝마로 변할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감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는 신데렐라를 보는 것과 같은 안쓰러움으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삶에 던져졌던 가정 B의 아내는 혼란 속에서 하나씩 문제를 해결하며, 그 속에 자신이 경험했던 삶을 녹여보려고 애쓰는 한 달을 보낸다.
두 부부가 카페에서 재회하여 그 간 느꼈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가정 B의 부부는 가정 A의 아내의 삶이 개선되도록 돕고 싶어 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욕구와 권리가 박탈된 그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그녀를 돕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정 A의 남편에게 '아내를 존중해주고 가정에서 남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주었으면 한다. 직업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도를 전한다.
가정 A에서 가장 희생당하고 있는 장본인인 아내가 갑자기 발끈하며 과격하게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우리 남편이 나를 얼마나 존중해주는지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인가? 나는 충분히 대우받고 존중받으며 살고 있다. 나는 일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집에서 아무 할 일도 없을 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는가? 그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난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 그리고 우리 남편처럼 좋은 남편은 세상에 없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당신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라며
그녀는 벌건 얼굴을 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삿대질을 하며 가정 B의 부부를 향해 화를 낸다.
결국 고성과 과격한 몸짓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가정 A의 부부와
도움을 주려는 의도로 말을 꺼냈다가 어이없어하며 입을 닫고 돌아서는 가정 B의 부부의
언쟁과 고함을 끝으로 에피소드는 마무리되었다.
정서적 학대로 할퀴어진 마음에는 그 흔한 연고 조차 바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행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관계, 나를 착취하는 관계 속에서도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비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며 그의 행동을 해명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느라 진땀을 빼는 사람들이다.
'내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회피 심리,
이 관계가 깨진 후에 맞닥뜨리게 될 불안정함을 피하고 싶은 무의식'
그것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 사람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다 보니 그들은 종종 이런 덫에 빠진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 거야."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피해자의 자존감은 곤두박질친다.
아마도 그들은 '자존감'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아내가
"당신이 나를 아내로서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어요."
라고 말하고 관계에 선을 그었었다면
남편은 둘 중 하나를 택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존중하거나, 그녀를 떠나거나.
그러나 그녀가 자존감을 버리고 관계에 매달리기를 선택하면서, 그녀의 삶은 개선의 여지를 잃어버렸고,
그것은 그녀의 남편에게도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남편도 건강하지 못한 자존감을 가진 아내와 함께, 삶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무기력하고 병든 삶 속으로 빠져버렸기 때문에.
잘못된 관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은 당신 자신의 몫이다.
'다시 그 상황이 되면 정말 잘해줄 텐데. 그때는 (바빠서, 잘 몰라서, 힘들어서) 그랬지. 지금 다시 곁에 있다면 잘해줄 텐데.'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큰 기대하지 마라.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더라도 그 사람은 또는 여러분은 똑같이 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오랜 기간 삶 속에서 몸에 익히고 또 익혀온 표현의 방식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다시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더라도,
그는 늘 바쁠 것이고, 바빠서 챙기지 못할 것이며, 다 지나고 나서 자신에게 아쉬운 상황이 찾아오면 그때 약간의 후회와 눈물 세 방울 정도를 소비할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사람보다, 다음 관계에서 다른 행동을 선택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내가 해야 할 행동들을 정리하고 실천에 옮기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면 희망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대개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며 배운다.
부모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다른 사람을 살피고 배려하는 방법 등을 보면서 배운다.
그것이 교육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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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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