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

2021.06.04

by 나침반
모펫 비행장의 C-17 군용 수송기 (2019.10.12)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난감해질 때가 있다.


바로 진입로가 지나치게 짧은 입구로 들어갈 때다. 너무 느린 속도로 4차선에 진입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무리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게 된다. 하이브리드 차이기 때문에 계기판에 RPM이 표시되지는 않지만, 엔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운전석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저속으로 갈 때는 전기 모터로 느긋하게 가다가 갑자기 내연기관을 가동해야 하니 엔진이 화들짝 놀랄 만도 하다.


금요일 퇴근 시간을 5분 앞두고 "미안하지만 이 계획서 좀 최대한 빨리 검토하고 수정 부탁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랑 비슷하게 느낄 것만 같다. (엔진아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기계에 관심이 많으시고 기계를 잘 아시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 비행기를 타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비행기가 엔진 출력을 높이면서 활주로를 질주하기 시작하면 "자, 지금 앞바퀴가 땅에서 떨어진 거야"라고 말하신 다음에 "이제는 뒷바퀴도 떨어져서 하늘에 떠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시던 기억이 난다. 착륙을 하는 과정에서도 날개에 움직이는 부품들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도 설명해주셨다.


지금도 비행기를 탈 때면 어느 순간에 땅에서 완전히 떨어졌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체감한다.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지만 현대 기술이 대단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백 명의 사람과 엄청난 양의 연료와 적재물을 실은 거대한 쇳덩이가 공중에 뜬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 쇳덩이가 에베레스트 산보다도 높은 고도에서 몇 시간씩 음속에 근접한 속도로 비행한다는 것도 여전히 기이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강력한 엔진이라도 비행기를 순식간에 공중에 띄울 수는 없다. 이 때문에 공항마다 활주로의 길이에 따라서 이착륙할 수 있는 기종이 제한된다고 한다. 무거운 비행기일수록 이륙을 할 때도, 착륙을 할 때도 길이가 긴 활주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C-17과 같은 군용 수송기는 특수 제작된 착륙 기어 덕분에 포장된 활주로가 아닌 평지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신속한 이착륙이 가능하지만, 민간 항공기는 그렇지 않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바로 정신이 드는 것은 아니다. 전기로 작동하는 컴퓨터도 부팅에 걸리는 시간이 있는데, 사람이 바로 정신을 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알람을 끄고 몽롱한 상태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밤 사이에 누구에게 카톡이 왔는지,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어떤 사진을 올렸는지, 지난 몇 시간 동안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다 보면 적어도 10분이 지나간다. 다시 눈을 붙일까, 망설이다가 15분 간격으로 설정해놓은 알람이 다시 울리기 전에는 일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침대를 가까스로 벗어난다. "이불 밖의 세상은 위험"하기에 매번 작은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다.


하지만 이제 고작 첫 번째 고비를 넘긴 셈이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침대 옆 매트에서 간단한 운동과 스트레칭을 하면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다시 한번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매트 위에서 몇 분 동안 조는 날도 있다.) 씻고 나면 나른해져서 다시 한번 침대가 눈에 들어온다. 잠옷을 뒤로 두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아침 식사와 함께 커피를 들이키며 시동이 걸리기 전에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책상 앞에 앉아도 1시간 정도는 딴짓을 한 후에야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재택근무가 계속되는 요즘, 쿠크다스보다도 쉽게 부서지는 의지 때문에 침대부터 책상까지 오는 1미터의 출근길은 필요 이상으로 험난하다.




일부 국가에서는 유사시에 고속도로를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적이 개전 초기에 공군 기지의 활주로를 타격하면 복구를 하는 도중에 대신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운전을 하면서 고속도로에 합류하는 입구의 진입로가 일종의 '활주로'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고속도로가 실제로 활주로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꽤 최근에 알게 되었다.


"바다 위의 요새"로 불리는 항공모함에서는 이륙의 문제가 더욱 어려워진다. 극도로 제한된 거리에서 비행기를 공중에 띄워야 한다. 이 때문에 "캐터펄트"라는 장치가 사용된다. 증기, 유압 등 다양한 형태의 장치가 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모두 동일하다. 마치 투석기처럼 기체에 순식간에 힘을 가해서 엔진의 출력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항공모함에서 전투기가 이륙하는 영상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격납고에서는 나왔지만 아직도 이륙을 못하고 활주로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서성이는 지금, 어떤 캐터펄트와 같은 마법의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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