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지다

by Lunar G

사랑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사랑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연인이 있어야 하고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하며 둘의 시간이 맞닿아야 했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절묘하게 닿아 사랑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시련이 주어졌다.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서로의 시간을 맞물려 돌려야 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그 마음을 억누르는 인내도 마주해야 했다. 상대가 좋아 죽을 것 같아서 시작한 사랑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철저히 무너져 내릴 정도의 시련을 견뎌내고 넘어선 후에야 제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러니 때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괴로움을 마주해야 함에도 사랑을 시작하려는 용기를 낸 것은, 그리하여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로 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적이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연인들을 위한 시계를 지키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랑의 종을 울려 그들이 사랑을 놓치지 않게 하는 일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내가 울린 종소리로 꽤 많은 커플이 헤어짐의 위기를 벗어나 사랑의 기적에 들어섰다.

사랑의 시계는 사랑에 빠지지 않아야 읽어낼 수 있었다. 사랑의 신이 맡긴 일을 하고 있었기에 나에게도 사랑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의 시계를 읽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보며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좋았다. 괴롭다고 해도 사랑에 빠진 이들은 전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나에게도 닿았던 것이었다.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알아보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빛이 보였고 그 빛을 따라 걸었고 그랬더니 내 앞에 당신이 있었다. 당신을 본 순간 나는 왜인지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그런 나를 보며 엷게 웃었다. 그게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게 사랑이 내게 닿았다. 그리고 나는 이후 사랑의 시계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랑에 빠지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지면 왜 사랑의 시계를 읽을 수 없게 되는지를. 당신은 당신의 눈에 깃든 나를 나는 내 눈에 깃든 당신을 가슴에 새겼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시간은 새롭게 조각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세상이 만든 시계는 우리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얻으면서 다른 연인들을 위한 시계를 잃어갔다. 주인을 잃은 시계는 고장 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어긋나는 연인들이 늘어갔다. 그 결과 신이 나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신에게 나에게도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신은 수많은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나에게 선택을 하라고 했다. 내게 닿은 사랑을 지우고 시계를 지키는 것을 택할 것인지 그와의 기억을 머금은 채 그와 떨어져 있을지를. 내가 바라는 대로 그와 함께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사랑을 지워버리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기적인 내 사랑은 그를 시계 수리공으로 만드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당신과 나의 시간은 어긋나게 되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나는 이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어긋난 시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당신은 끝없이 시계를 고쳐댔다. 당신이 고치고 있는 시계가 사랑의 시계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그리워질 때면 당신은 고장 난 시계 앞에 앉아 시침과 분침, 초침을 매만졌다. 나는 당신이 만든 시계들의 초침 소리를 신에게 들려주며 어긋난 우리의 시간이 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신이 고친 시계가 천 개가 되던 날, 신이 말했다.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리하여 나는 당신에게 닿았다. 벚꽃이 되어 말이다. 왜 벚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신이 그 말을 하던 순간 당신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러자 하얀빛과 하얀 꽃잎이 보였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당신이 없는 이곳에 홀로 있는 것보다 잠시 피었다가 사라진다 해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를 기다리며 끝없이 시계를 고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봄 한철 꽃잎이 되어 져 버린다고 해도 당신 옆에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신은 나를 향이 지워진 꽃으로 만들어 당신에게 보내주었다. 향기가 번지면 당신이 나를 금방 알아차려 버릴 테니 향을 지워버린 것이었다. 하얗고 투명한 꽃이 되어 봄 한 계절을 당신 곁에 머물렀다. 꽃이 다 져 버리면 당신을 볼 수 없을 테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었기에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곁에 있는데도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에게서 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에 슬픔이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안도를 느꼈다. 내게 향이 남겨져 있다면 당신은 나를 금방 알아차리고는 큰 소리로 울어버릴 것이었다. 나의 숨결을 느껴지면 당신은 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나를 떠올리게 되면 머리가 마비되고 가슴이 멎어 버릴 것이므로 나는 당신이 그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미어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내내 울기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당신이 나를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꽃이 되어 당신을 토닥여주고 있고 싶었다.

당신이 춥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곁에 없어도 당신이 온기에 둘러싸였으면 했다. 꽃잎 하나하나에 사랑을 담아 떨어지며 당신을 매만졌다. 꽃잎이 당신에게 닿을 때마다 사랑한다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도 당신은 내 사랑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당신은 어긋난 우리의 시간이 닿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를 매만지듯 시계를 붙들고 앉아 있었다. 시계를 너무 많이 만져 손이 다 헐었는데도 당신은 시계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시계를 잡고 있지 않으면 내가 당신에게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잡고 한숨을 쉬는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당신이 벚꽃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보고 싶다.”

당신의 찢어진 손에 꽃잎이 닿았다.

당신의 손끝에서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꽃잎 위로 당신의 눈물이 떨어졌다. 당신이 꽃잎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사랑해"

꽃잎이 당신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꽃향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당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당신이 꽃잎을 하나씩 손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양손 가득 꽃잎이 채워지자 눈물과 함께 꽃잎에 입맞춤을 했다. 당신의 입술이 나의 손에 닿았다. 나의 눈물이 당신의 손등을 적셨다. 당신과 내 눈이 맞닿았다. 멈춰있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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