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하얀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그는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녀인 것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남자의 고개가 돌아간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데 그 속에 그녀는 없다. 주변이 온통 사람인데 그녀만 보이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인파 속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독을 느낀다. 꽃이 말라가는데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바람이 치맛자락을 날리더니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여자가 오슬거리며 어깨를 움츠린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에 가까워져 모두가 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여자 홀로 여름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다. 기다림만 아는 그녀이기에 혹여 그가 올까, 계절이 바뀌었음에도 옷을 바꿔 입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둠이 있다. 어둠이 둘의 눈을 가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서로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한다. 눈앞에 그가 있는데 그를 만질 수 없다. 눈앞에 그녀가 있는데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두 사람의 시간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이 눈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이 만들어내는 눈물이 아니다. 자신과 같은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고 있을 상대를 향한 안타까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의 섬에서 여자는 여자의 섬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그리고 그를 기다린다. 운명이 그들을 한 곳에 이르게 할 것임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는 그날까지 그가 지치지 않기를, 그는 그녀가 기다림에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달이 해를 안은 시각, 바람에 그의 향이 실려 온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함께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린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어둠이 걷힌다. 그녀의 모습이 빛이 되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의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