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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Jul 17. 2022

이방인의 고군분투 정착기

  한국에서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까지 비행기로 20시간, 나이로비 공항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1시간, 나이로비에서 조그마한 소도시인 보이까지 버스로 6시간, 보이 읍내에서 사갈라 마을까지 마을버스로 1시간, 마을 입구에서 산 중턱까지 도보로 1시간, 총 29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현지 홈스테이 집에 도착했다. 높다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지평선 끝이 내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도착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케냐 나이로비에 위치한 고속버스터미널 풍경
케냐 사갈라마을을 향하는 현지 교통수단과 시골길

  낯선 땅이지만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편안함이 머물다 지나가자, 곧바로 두려움이 나의 의식을 지배했다. 나는 인천공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뭔지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낯선 아프리카 땅에 도착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자기 합리화였다. ‘낯선 곳에 가면 감정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동시에 ‘얼마나 힘들게 도착한 아프리카인데. 끝까지 살아남도록 하자’며 나의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현지에 도착해서 내가 걱정한 건 딱 한 가지였다. 나도 모르게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3일 안에 절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가다 보니 가족애는 조금씩 자연스레 사라져 갔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낯선 곳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가족애를 압도했다. 전기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밤길에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내가 처해 있는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하고 치열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아프리카 오지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난생처음 겪는 일로 내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가 있던 상태였다.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온 현지 NGO 관계자와 시내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공항을 벗어난 지 10분도 채 안 되어 택시가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운전기사는 페트병을 하나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샌가 내가 타고 있던 택시 주변으로 현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택시 창문을 통해 과일을 필두로 온갖 잡다한 상품들을 내 얼굴 앞으로 쑤셔 넣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줘야 할 현지 관계자는 택시 밖으로 나가버리고 없었다. 나무 그늘 아래로 향하더니 그곳에서 그는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택시기사가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찬 페트병을 가지고 왔다. 차량의 주유구를 열더니 페트병에 담긴 기름을 넣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된 자동차라 차량 내의 모든 계기판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연료 게이지를 통해 남은 연료량을 확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차량이 멈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는 채 택시 안에서 연신 식은땀을 훔쳐내야만 했다.


  나는 아프리카 시골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학교는 오지마을의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홈스테이 집에서 20분을 더 걸어 올라가는 여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매일매일 험한 산길을 걸어야만 했다. 나는 신발이라도 신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길을 맨발로 다녔다.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나 보다. 호기심 어린 눈빛의 어린 친구들은 유리창이 없는 벽돌 창문 사이로 이방인의 모습을 훔쳐보고자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교실 밖으로 튀어나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그렇게 어린아이들의 이방인을 향한 호기심, 그리고 경계심과 제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처음 본 아이들에게 이방인의 등장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고맙게도 그들은 내 행동 하나하나에 격한 반응을 보여줬다. 먼 곳에서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가도 내가 신발 끈을 고쳐 매기라도 하면 그 찰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나를 둘러싸고 그들만의 재미있는 숨바꼭질 놀이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 아이에게 손을 건넸다. 그러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내 손을 서로 만지려고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나는 어린 친구들에게 살아 있는 피에로 인형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 오지마을의 어린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있었다.                                                                                           

사갈라 마을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초등학교와 아이들 모습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아이들과 첫인사를 순조롭게 마쳤다. 낯선 땅에서, 현지인들과의 첫 만남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홈스테이 부모님은 내가 사갈라 마을에 장기 봉사를 하러 온 첫 번째 외국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반겨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당연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의 등장을 반가워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학교 봉사 수업은 대개 이른 오후 시간에 끝났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의 조그만 공터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항상 배구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대학교 때부터 배구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운동도 하면서 또래의 청년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마을의 청년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운동을 함께 즐기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럴 때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단체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돌아온 건 허공 속 메아리뿐이었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하루는 배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공터에 들르지 않고 아무 일 없듯 그냥 지나쳤다. 먼 곳에서 공터를 뒤돌아보니, 그들은 태연히 배구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도 이방인의 등장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마냥, 나의 등장은 그들로부터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밭에서 농사일을 돌보시는 몇몇 할머니들을 제외하고는 따뜻한 인사로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호의적으로 말을 건네주는 친구들은 언제나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초대받은 집에서조차 집안 어른들은 바쁜 일을 핑계로 자리를 떠나기 일쑤였다.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적인 일이 나에게는 사치로 느껴졌다. 홈스테이 가족들은 “지금은 농번기로 일손이 바쁜 시기다. 바쁜 일이 끝나면 사람들이 나를 집으로 초대할 것이다”라고 말해주며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름 모를 식물과 집에서 키우는 가축이 나의 대화 상대였다.

사갈라마을의 홈스테이 집과 가족들

  아침에 일어나,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오고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일로 나는 하루를 맞이했다.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에게 수학과 체육 과목을 지도했다. 학교에서의 봉사활동이 끝나면 집으로 와서 집안일을 도왔다. 대부분의 집안일은 소먹이용 풀을 베어오거나 저녁 식사 준비에 필요한 땔감을 구해오는 일이었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육체적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못 먹어서이기도 했지만 환영받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이 더 컸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반복되었다. 어느덧 두 달이라는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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