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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Jul 28. 2022

나를 키운 할머니의 감자 하나

  홈스테이 집에서 키우는 젖소 울음소리와 함께 나의 일상은 시작되었다. 내가 머문 사갈라 마을은 고산지대라서 아프리카 치고는 꽤 날씨가 쌀쌀했다. 그래서 항상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차는 오지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호식품이다. 아침에 갓 짠 신선한 우유에 찻잎을 넣고 끓이면 마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밀크티가 된다. 개인 취향에 따라 설탕을 한두 스푼 정도 넣어 마신다. 나는 웬만하면 설탕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차를 마시는 편이었다. 홈스테이 집 찻장 위에 놓여 있는 설탕 용기에는 항상 개미가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차에 둥둥 떠다니는 개미를 골라내는 작업이 힘들어서 순수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아프리카에서 차를 즐겨 마셨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물갈이로 고생을 좀 했다. 그렇다 보니 사갈라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주로 생수를 사서 마셨다. 그러나 오지마을에서 생수를 확보하는 게 여간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고상한 척 생수만 마시는 이방인으로 비춰지는 것도 싫었다. 현지 문화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크나큰 숙제였다. 현지 사람들의 식습관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오지마을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홈스테이 가족들이 아침마다 웅덩이에서 길러온 물을 마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식생활 문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홈스테이 초창기 시절엔 나무 땔감으로 물을 끓여 마셨다. 하지만 땔감 특유의 탄 맛이 물에 배어 오히려 물을 마시기가 거북했다. 그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하루에 10잔 이상의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밀크티는 찻잎의 독특한 향이 물에 배인 탄 맛을 희석시켜 버렸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마실 정도는 되었다.


  주말이면 차 한 잔과 식빵 두 조각으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을 먹고 나서 여지없이 나는 탐정놀이를 시작했다. 가가호호 마을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로 나에게 찾아온 주말의 변화였다.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나를 힘들게 했던 고민거리가 있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천사 같은 얼굴을 구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모두가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아이들로 보였다. 남자와 여자아이의 성별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굴이 헷갈리다 보니, 아이들의 이름을 매번 뒤죽박죽 섞어 불렀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은 나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아이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확실히 구분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장례식 참석을 계기로 오지생활 완벽히 적응해나가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초대가 줄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면서부터 그들의 다양한 인생 스토리를 접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다 보니 각각의 집에 얽혀 있는 사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교에 봉사하러 오가다 보면 파란 지붕의 신식 주택을 항상 지나다. 나는 그때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루는 5학년 남자아이의 초대를 받아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해하던 그 집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었다.


  어린 친구는 제일 먼저 나를 아빠에게 소개해주었다. 아빠의 직업은 경찰이라고 했다. 그 집은 젖소 두 마리, 오골계 세 마리, 닭 열 마리를 길렀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종류와 숫자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하지만 어린 친구의 아빠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초면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전기도 없는 오지마을에서 유일하게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 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은 밤에도 보란 듯이 커튼을 쳐놓은 창문 틈으로 하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곳은 항상 마을 남자들로 붐볐다.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자신감과 호기심이 내 몸을 그 집으로 이끌었다. 탁자 위에는 빈 술병으로 가득했고 옆에는 맥주 박스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몸을 비틀거리며 꼬인 혀로 “우리 외국인 선생님도 맥주 한 잔 마셔.”라면서 내게 맥주를 따라 주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나를 집으로 초대했던 어린 친구의 아버지였던 것이었다. 그는 경찰 업무를 끝내고 마을 친구들과 맥주 마시면서 나름의 행복한 인생을 즐겼다.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시간이 나에겐 또 다른 재미와 행복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해가 어둠으로 사라진 늦은 저녁, 달빛에 의지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팔다리에는 상처가 생겼고 온몸엔 멍이 가득했다. 내 몸은 오지마을에서만 가질 수 있는 영광의 상처를 쌓아갔다. 그래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음의 여유는 재물의 많고 적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할머니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어느 날 오후, 마을 이장님의 집에 들러 차를 한 잔 얻어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갑작스레 할머니 집에 초대게 되었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 한 구석에는 방금 생명력을 다한 하얀 재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거의 다 쓰러져가는 집안에는 변변찮은 생활 도구조차 없었다. ‘할머니께서 제때 음식을 챙겨 드시기는 하는 건가?’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짠하고 불편했다. 가난한 할머니 집에 초대받아서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행여라도 음식이나 차를 준비하실까 봐 걱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감자 하나를 접시에 담아 오셨다.


  직감적으로 그 감자가 오늘 할머니가 드실 저녁 식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이장댁에서 빵과 음료를 먹고 오는 길이라 배가 불러요.”라고 할머니께 정중히 말씀을 드렸다. 감자 하나에 담긴 할머니의 환대에 나만의 방식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오지마을에 봉사하러 온 귀한 손님이라면서 감자를 계속 권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절반을 떼어 입 안으로 넣었다.


  할머니는 살아생전 제대로 된 든든한 한 끼 식사를 드시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거친 손과 주름진 얼굴을 보니, 한국에 계신 외할머니가 불현듯 떠올랐다. 외할머니도 손자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우리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내어 주셨다. 손자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이유로 정작 본인이 드실 음식에는 소홀했었다.


  사갈라 마을의 할머니는 자신의 유일한 저녁 식사인 감자 하나를 나에게 기꺼이 나눠주셨다. 내가 마을에 온 귀한 손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할머니라면 기꺼이 나의 유일한 먹거리를 낯선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라고. 나는 ‘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할머니는 나에게 이런 행동을 보여주실 수 있는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따뜻하면서도 이타적인 마음씨는 내 인생의 모든 걸 바꿔버렸다. 할머니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방향성을 정해주셨다. 마음의 여유는 재물의 많고 적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할머니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할머니의 감자 하나는 마음이 가난했던 나를 성숙한 인간으로 한 단계 성장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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