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빌어먹을. 이런 것들. 길몽도 악몽도 아닌 어중간함 속에서 눈을 떴다. 시작은 몹시 설레었지만 중간은 미지근했고 끝은 미저리다. 아직 새벽이다. 스물네시간 무뚝뚝한 벽시계는 작은 바늘이 네시를 가리킨다. 다시 잠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오늘 하루는 꽤나 길 것 같다. 문득, 프리츠 오르트만의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가 떠오른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곰스크, 어깨를 움츠린채 개찰구를 통과하는 숱한 사람들. 낡은 코트깃을 여미는 중년의 여자. 어제의 신문을 펼쳐든 사내. 선로를 덜커덩 거리는 기차. 이 무거운 의식으로 맞이 하는 새벽 종착역의 아스라 함. 아직 눈꺼풀이 무겁다. 하필 왜 곰스크 였을까? 주인공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이 순간 모든 것은 까맣다. 달빛 아래 검은 사자 후를 뿜어대던 창 밖의 소리마저도 어둠에 묻혀 지극히 소심해진다. 작년 삼월 이후 귀팝으로 가득한 내 귀는 더 크게 열린다. 빛이 어둠에 물드는 유일한 시간이다.
작은 불빛 몇 개를 제외하면 온통, 어둠 뿐인 지금은 몇 달을 제쳐둔 채 먼지만 풀풀 내려앉은 푸른색 표지의 '존재와 시간'이 더 어울린다. 하지만 나는 몇번을 읽어도 난해한 '하이데거'의 주어를 선택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나 희미했고 한계가 없어 보이는 자유로운 영혼들 속에서 내 시간은 어떤 강박 속에 묶여있기에. 존재는 시간에 묶여있지만 때로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존재가 없는 시간은 무의미 하니까. 존재와 시간은 결국 하나로 묶인다.
곰스크로 떠나는 기차가 떠오른 이유를 알것 같다. 달랑 배낭 하나 메고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자들의 자유의지란, 그리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적어도 만 톤 정도로 쌓인 일상의 무게를 발로 걷어 치워야 가능하다. 한때는 나도 그런 과감함이 있었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옆에 낀 채, 소록도의 중앙 공원, 여수 앞바다를 삽시간에 수놓던 오동도의 짙은 물안개, 보성의 녹차 밭, 이름 없는 간이 역들, 그리고 부산의 태종대와 해운대, 한때의 영광을 훑고 지났을 레드카펫위를 신나게 걸었다.
도나우강의 잔물결, 퐁네프의 연인들, 아우슈비츠, 개선문, 퐁피두센터...그리고 에펠탑처럼 이국적이지 않은 곳. 나는 단지 곰스크만을 염원한다. 이때의 집시같은 낭만은 주로 무궁화호의 첫번째나 마지막칸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텅빈 좌석보다는 승객들로 가득한 입석에 있었다. 캔커피와 캔맥주와 오징어다리. 이때의 나는 캔 맥주 서너 개 정도는 한 번에 마실 수 있었다. 마셔도 약간의 트림만 했을 뿐 촘촘한 세포로 단단한 내 신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코끝에 바람이 불면 과감히 떠나야 한다. 때로는 어떤 핑계를 대고서 라도 무조건 떠나야 한다. 존재는 시간에 묶여있고 시간은 유한하니까. IS의 인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선 세계에서 어느 순간에 존재와 시간이 하나가 될지 모르니까. 현실의 열차는 좀처럼 내가 기다리는 간이 역에 서지 않는다. 그 간이 역 마저 하나 둘씩 사라진다. 하여 곰스크로 떠나는 기차는 이제 환영일 가능성이 높다. 컹컹 짖어 대는 강아지도 코트 깃을 여미는 중년의 여자도, 그리고 어제의 신문을 펼쳐 든 사내도 없다. 그래도 나는 빈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지금 내가 매일 타야 하는 버스는 중앙 시장 스탠다드차타드은행 220번이나 303번이지만....저기 밤 열 시만 넘으면 상대원 고개를 초 스피드로 질주하는 220번 버스가 온다.
차가운 기계 음성이 아닌 상냥한 버스 안내양이 문을 열어준다. 승객들은 많지 않다. 난폭 운전이 습관이 된 버스기사는 새로 산 교통 카드는 받지 않는다. 백원짜리 동전으로 차비를 내기 전 나는 상냥한 그녀에게 묻는다. 저기요! 곰스크로 가기 위한 제 일상의 무게는 지금 저 구식 동전 함에 얼마나 차 있을까요? 상냥한 그녀는 째려보기만 할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잠시후 손님 죄송하지만 백 원이 부족합니다. 돌아오는 음성은 다시 차가운 기계 음성이다.
2015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