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후.
요즘은 종종 점심을 굶는다. 하지만 요즘의 나에게 굶는다는 행위는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에게는 점심을 먹는다는 사실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오즈의 마법사처럼 나의 현실에서 점점 신기한 일이 되어버렸거든. 그것은 잠에 취한 채 매일 아침을 굶던 것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방식이자 드러냄이지. 그렇다고 집이나 사무실에 밥이나 반찬이 없는 건 아니야
냉장고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식빵과 유통기한이 사흘 정도 남은 우유와, 물엿과 설탕에 버무린 멸치볶음이 두껍고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가득 담겨 있다고. 하지만 내가 사무실에서 열심히 모니터에 펼쳐진 숫자와 씨름을 하다가 문득 허기를 느끼고 마지못해 손잡이가 제각각인 트윈형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이제는 다 식어버려 특유의 향긋한? 냄새마저 사라져 버린 청국장이었어. 차가운 식탁에 앉아 차갑게 식어버린 청국장에 밥을 말아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런! 전자레인지를 돌릴걸 그랬나?"
한 일분 삼십 초만 돌렸어도 내 위장과 목젖이 이토록 차갑지는 않았을 텐데. 무른 김치는 더 삭았고 밥솥에 있던 밥알은 갈색으로 변했는데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그것들은 아마도 다시 흰 쌀이 되어버렸을지도 몰라.
왜? 뭐지 그런 시선들은.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검은색 밥알이 병아리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잖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콘도의 주전자 속 강아지들처럼
짹! 짹! 삐약! 삐약!
네가 없는 시간에 내가 있어야 하는 여기 주방의 하얀 벽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해 저 붉은 창의 강화 유리는 좀 시끄러운 게 아니거든. 누가 좀 저 영원할 것 같은 수다를 말려주면 좋겠는데
사진출처-pixabay
제발!
나의 도저하고 때늦은 침묵이 저 붉은 강화유리의 오랜 수다스러움을 이길 수는 없겠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이 세계는 내가 있기 전부터 항상 그래 왔을 테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유리창이 아니라 창 너머의 한없이 투명한 세상이겠지만. 유리는 어쩌면 수다스러운 게 아니라 외계의 수다를 막는 보호막일지도 몰라. 그리고 수다스러운 이 세계와 잘 어울리는 한 사람을 바로 내 앞에 풀어놓은 건지도 모르지~
아! 근데 말이야 사방이 붉은 창으로 둘러싸인 내가 서있는 여기는 너무 거대해 여기는 크고 넓고 너무나 거대해! 바깥보다도 더 넓고 거대할지도 몰라 그래서 이따금씩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고. 기껏해야 서른 평 정도..였..었는데. 지금껏 내 삶의 영역은~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후회는 아니야. 그럴 바엔 차라리 점심을 한 달은 굶는 게 나아
하지만.
여전히 내 오감과 모든 신체의 기관들은 이 거대한 공간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해. 열 걸음을 가야 할 곳을 서너 걸음 떼고서 몸을 비틀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기 일쑤거든. 두 걸음을 가야 하는데 다섯 걸음을 더 가서 난데없이 쾅! 하고 이마를 부딪히거든
아야. 아프다고!
이번엔 진짜거든. 난 늑대소년이 아니야. 피리 부는 사나이는 더더욱 아니고. 이니스프리의 호숫가를 거닐고 싶기는 해. 난 항상 그 동네의 개들이 부러웠거든. 애초에 경고문은 어디에도 없어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거라고. 몰랐어? 정말! 바보 아니야
아파 죽겠는데 말이야. 도무지 반응이 없어. 누구도 내 몸부림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왜냐고? 지금은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도 없어야 하는 시간이니까. 어떤 심리적 거리감을 넘어선 실제적인 공간의 거대함이 돌 올하 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 나는 매번 너무나 강렬해
그것은 부처의 깨달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마에 혹이 올라오는 순간의 나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어. 하마터면 바닥으로 수저를 떨어트릴뻔했어. 매번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양팔을 최대한 뻗쳐도 아무 곳에도 닿지 않아. 이 세계의 벽들은 항상 저 멀리에 있으니까. 애써 다가가려 하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거든. 다가가 보았자 사라지는 벽들이니까. 벽들은 모두 사라져. 어제의 바람처럼 휘리릭~소리도 없이 낙엽만 짓밟인채
나는 차라리 이 거대한 공간을 떠 받치는 기둥이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얀 벽이 되고 싶지는 않아. 수다스러운 유리창을 뚫고 나가고 싶지도 않아. 나는 이 거대하고 단조로운 세계에서 단지 잘 지내고 싶을 뿐이라고~ 그냥 쫌 예전처럼 재미있게.
2015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