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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하마을을 가다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벼르던 휴가를 냈다. 여행 이튿날이다. 첫날 목적지였던 정선 카지노는 상상했던 것처럼 크고 거대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휘황찬란했다. 드라마나 스크린속에서만 보던 이곳은 내게 미지의 공간이자 완전한 신세계였다. 하지만 이곳은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추적 60분에서 보았던, 삶에 실패한 낙오자들처럼 비극적이거나 그럴싸하게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멋진 유니폼을 입은 딜러나 경호원, 청소부나 호텔 뷔페의 조리사들은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부단히 노력중이다. 그들의 반듯한 태도와 걸음걸이, 그리고 상냥한 미소는 웬지모르게 날카롭고 선득하다.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문득 시간을 돈으로 사는 '인 타임'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카지노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돈이 아니라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지불한 시간을 쓸어 담는다. 그렇다면 내 하루의 시간은 지금 여기서 과연 얼마로 소비될 수 있을까?


나는 지갑 속에서 삼만 원을 꺼내 오천 원짜리 칩 여섯 개로 바꿨다. 블랙잭, 바카라, 포카! 그중 빅휠이라는 게임을 했다. 골드 2, 에메랄드 5. 얏호! 내 시간을 5배로 벌기도 했다. 하지만 빅휠은 내 돈 삼만 원을 너무나 간단히 삼켜버렸다. 사람들은 시간을 잃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무한정 제공되는 아메리카노나 콜라같은 무료 음료를 마시며 그들의 남은 시간을 소비한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하루, 일주일, 혹은 한 달을 힘들게 지불한 시간을 이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한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나는 운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일까? 언제였을지 모를 과거의 내 하루가 다이아몬드 10과 에메랄드 5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다음에 또 이곳을 찾는다면 그 이유는 예쁘장한 딜러가 돈을 몽땅 쓸어 담는 블랙잭이나 바카라가 아니라 만 팔천 원짜리 뷔페식 김치찌개 때문일 것이다.


IMG_3414.JPG 김해 봉하마을


정선에서 봉하마을로 다섯 시간을 달려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에 참석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듯한 길치인 탓에 정선의 민둥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느라 봉하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가 넘었다. 추모식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봉하마을은 골목마다 노란색 바람개비를 든 추모객들로 붐볐다. 나는 그때서야 허기를 느꼈다. 헌화를 마치마자 장터에 철퍼덕 자리를 잡고 소고기 국밥 한 그릇 주문해서 허기 먼저 때웠다.


IMG_3419.JPG 김해 봉하마을

"엄마 저기, 무지개가 떴어요!"


밥을 먹는데 옆에 있던 귀여운 꼬마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꼬마의 말대로 저물어가는 하늘 저편에 희미하지만 무지개가 떠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 게걸스럽게 목구멍으로 퍼 나르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렸다. 그러저 내 옆의 사내도 셔터를 눌러댔다. 하나, 둘. 그는 에셀알 카메라가 두 대다.


보고 싶습니다.

대통령님, 영면하소서!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방명록엔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짧은 글들이 적혀있다. 수많은 사연을 담은 방명록 맨 마지막 자리에 나는 단지, 오늘 다녀갑니다,라고 적는다. 내일은 내 세 번째 소설 '깨어있는 시간'의 원형이 되었던 김주익 열사의 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내가 정말로 늦은 곳은 바로 그곳이기에.


2015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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