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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채우는데 걸리는 시간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머리카락이 눈을 찌른다.


눈이 뻑뻑하고 따갑다.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 때가 되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인공눈물을 찍어 바른다. 그래 머리카락을 자르는 거야. 하지만 나는 남성 전용 '나이스 가이'를 가기 전 최소한 일주일은 고민을 한다.


동네 미용실은 다니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다. 오래전 방송대학교를 다닐때 알고 지내던 형님이 운영하는 미용실이다. 언제 가지? 오늘은 잘라야지. 그렇게 하루 이틀 고민하다 보면 미용실 문을 열기까지 이주일은 걸린다. 어떤 것에 결핍을 느끼고 그것을 실행하기 전 오래 뜸을 들인다.


사진출처-pixabay

나는 즉흥적인 인간은 아니다.


나는 어떤 행위를 하는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다. 특히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사례는 많다. 작년엔 계절에 맞는 옷을 산적이 없다. 옷이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옷만 놓고 보자면 작년에 나는 어디에도 없는 시간을 살았다. 어디에도 없는 계절을 살았듯이 낡은 노트북에 결핍을 느끼고 새것으로 바꾸는 데는 삼 년이 걸렸다. 고장 난 세탁기를 바꾸기 전까지는 육 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내 손이 조금 고생을 했지만 매일 아침 흰색 메리야스를 갈아입을 때마다 찜찜한 세제 향이 아닌 비릿한 빨래 비누향이 내 코를 즐겁게 자극했다. 결국 그렇게 한 겨울을 지낸 후 비염으로 시달리는 코의 즐거움보다는 내 차가운 손의 편리함을 택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드럼에 반한 후 내 손에 스틱이 쥐기까지는 오 년이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첫 공연을 하기까지는 십 년이 걸렸다. 십 년을 넘게 쓰던 냉장고가 고장이 나고 그것을 내 방 한구석에서 치우기까지는 일 년이 걸렸다.


새치가 듬성듬성 난 검은색 머리를 와인색으로 물들이는 데는 삼 실 칠 년이 걸렸다. 중학생 이후 고수했던 짧은 머리를 5대 5 가르마의 장발로 바꾸는데도 거의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가장 활기차고 싱그러웠을 이십 대에 나는 단 한 번도 바람 불 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왜 그러는 걸까?


이 오래된 불편함을 감수하는 까닭은. 그런 미룸은 추하거나 나쁘다기보다는 미련이라서. 바보같은 미련은 언제부터 내 안에서 변하지 않는 원칙을, 기준을 세웠던 것일까. 그것은 미련이 되고 종국엔 결핍이 되었다. 모든 미련은 충족되지 않는 결핍이다. 시간이 걸릴 뿐 결핍은 결국 충족된다. 어제 여전히 쌩쌩하지만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버리고 최신형 LED TV를 샀다.


낡았지만 쌩쌩한 무언가를 버린 적은 처음이다. 뭐랄까? 기분은 텔레비전과 TV 같은 차이다. 내 안에는 바보같은 미련만큼이나 오래 두고 쌓여 있는 결핍들이 많다. 청도(청뚜)와 이스터섬의 거인 석상과 테스의 스톤헨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사소한 시작은 여권발급을 위한 사진관 부터다.


가끔은 나도 즉흥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오 년 전 겨울 무렵 302번 버스를 기다리던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된 결핍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리움을 포함한 감정이라서 돈이나 어설픈 열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결핍은 아니다. 그 시간 나는 그녀에게 과감해야 했다. 즉흥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그녀에게 용기 내어 다가가지 못했다. 모든 것은 예외가 있듯이 나는 앞으로도 즉흥적인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애틋한 결핍은 결국 충족되지 못할 것이다.


2015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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