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만남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담담함으로 이별 앞에 서다

by 그리여

홀로 이별하지 못하였으나, 글을 쓰는 동안 조금씩 지난 일들이 담담히 받아들여지고, 잊었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이제야 이별이 그저 지나가는 계절처럼 인생의 한 부분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별로 인하여 삶은 더 깊고 소중한 나만의 보물함을 만든다. 때로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안에 담으면 보물이 되는 것이기에 어느 날 무심히 열어본다면 그 또한 기쁨일 것이다. 쓰지 않았던 하찮은 일상이 글로 쓰면서 특별함이 되고, 기록을 함으로써 나의 역사가 되었다.


엄마를 보내고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나서 시골집 장독대를 열어보았다.

반질반질했던 장독대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있었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 지쳐서 빛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윤기가 사라졌다. 그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된장이 까맣게 썩어있었다. 숨 쉬던 항아리가 그 시간 숨을 멈추고 된장을 품어주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여태 장을 담가서 먹었지만 한 번도 썩은 것을 본 적은 없었기에 적잖이 충격이었다.


메주를 만드는 날은 온 집안이 안개 같은 자욱한 김으로 가득했다. 풍기는 냄새에 따뜻함이 묻어났으며 엄마는 콩을 한 번씩 저어주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나는 불을 조절하며 지피면서 가마솥에 콩을 삶고 뜸을 들이고 구수한 냄새에 취해서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다. 똘망하던 콩이 긴장을 풀고 축 늘어지면 체로 건져서 엄마가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면 콩을 으깨서 면포에 싸서 틀에 맞춰서 끼워주면 나는 꾹꾹 밟아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그러면 엄마는 짚을 엮어서 새끼줄을 만들고 메주를 묶어서 방의 한쪽 구석 천장밑에 만들어놓은 작은 나무걸이에 매달아 두셨다.

메주가 주렁주렁 감처럼 달려 있으면서 겨우내 숙성되어 가는 냄새가 배어있던 방의 쿰쿰함이 아직도 코 끝에 생생하다.

힘든 시절 왠지 풍요로움의 상징 같던 메주가 된장으로 재탄생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림처럼 머리에 그려지고 한참을 멍하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런 황금색이 까맣게 될 동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니. 너도 알고 있었니. 혼잣말을 맥없이 해본다. 엄마가 없는 지금 된장이 썩은 것을 보게 되다니, 젖은 마음이 수렁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사물도 사람의 난 자리를 아는 것인가

든 자리는 모른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고, 까맣게 썩은 된장은 나의 마음과 같은 색으로 그 안에서 엄마를 보내고 있었다.


바람이 분들 날려가 잊힐쏘냐

꽃이 떨어진들 마음도 떨어질쏘냐

가시는 곳 몰라 찾지 못하는 서글픔이 사라질쏘냐


그럼에도 일상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바쁘게 살아내고, 남겨진 자는 떠난 사람의 그림자를 더는 밟지 않고 또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고 잘 보내주는 것이 할 일이건만 오랫동안 등한시했다.

그저 시골집에 가면 아직도 계실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고 살다가, 온기 없는 텅 빈 거실에서 현실을 확인하고 남몰래 조용히 한숨을 쉬면서 조금씩 조금씩 난 자리를 확인하곤 했다.


후폭풍이 오랫동안 몰아치면서 눈물을 말려버리고, 엄마가 안 계신 순간을 시시때때로 확인받는 시간들이 생기면서 공허함이 밀려왔다가 인정하고 묵은 감정을 밀어버리기를 반복하다가 이제는 이별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희미한 길을 찾으며 긴 글을 썼다.

그러다가 엄마를 만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들이 드문드문 생각이 났다. 더 잊히기 전에 얼른 글로 기록한다.

아마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이것 조자도 기억나지 않겠지 하는 순간들을 적으며 얼마나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던가

11년이란 세월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울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했고 엄마와 마주한 그 순간 눈물이 흐른다.

마냥 슬프기만 한 눈물이 아니다. 또다시 엄마를 만나서 기뻐서 우는 눈물이었다.

주르륵 흐르는 맑은 눈물에 이별하지 못하였던 마음을 녹여서 흘려보낸다.

떠난 사람은 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오랫동안 글 안에 넣어두고 시시때때로 추억으로 살아날 것이다.


이제 나는 딸들의 엄마로서 온전히 살고 있다.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흔들림 없는 나의 사랑을 주고 있다. 때로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 것뿐이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지만, 그들의 말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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