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워? 나만 믿어
"얘들아 일어나 봉사권 받으러 가야지"
"졸려 비 오는데 안 가면 안 돼?"
"오늘은 꼭 가야 돼 드럼세탁기가 걸려있어"
"그거 우리꺼야 받으러 가야지"
자는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따라나선다
남산 거북이 마라톤을 참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남산둘레길 7킬로를 걷다 보면 추첨권을 받을 수 있다
미스코리아들이 나눠준다
가면서 쓰레기를 주으면 2시간 봉사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학교에 제출했다
걸어가다 보면 남산아래 동네가 훤하게 눈앞에 나타나고
날이 맑으면 해가 뜨는 걸 보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은 길이었다
무엇보다 출발하기전에 입구에서 사먹는 순두부는 너무 맛있다
비가 와서 그런가 평소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인원이다
무대가 설치된 곳에선 행사가 진행 중이고 그 행사가 끝나면 추첨을 한다
나눠준 번호를 쭈욱 깔아놓은 어르신도 제법 많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많이 받을 수 있었지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날은 감이 좋았다
추첨번호를 부르는데 내편이 든 번호가 불렸다 휴지가 당첨됐다
그 이후로 계속 번호가 불려지고 신나서 쫓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1등 추첨이다
드럼세탁기는 내꺼라고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두구두구!!!!!!!!
번호를 부르는데
우와!! 둘째가 들고 있던 번호다
내편이 딸을 대신해서 무대로 올라간다
드럼세탁기가 우리의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생애 처음으로 인생리엑션을 했다
신나 하는 애들과 방방 뛰면서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공짜는 양말 한 짝도 받은 적이 없는데 이런 행운이 생긴 게 꿈만 같았다
세탁기가 망가져서 사려고 하던 참인데
너무 비싸서 망설이고 있던 중이라 더욱 기뻤다
그렇게 드럼세탁기가 우리 집에 떡하니 들어왔다
5 식구가 '하루가 멀다'하고 내어놓은 빨래는 처리하기에 바빴다
돌리고 돌려도 세탁기는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일하는 기특한 녀석이다
"니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니 넌 감동이야!!"
결혼할 때 혼수로 가지고 왔던 통돌이
"그동안 고생했다" 아쉬운 작별을 했다
새롭게 들어선 행운의 아이콘 드럼세탁기가
내 인생 최고의 감동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1등에 당첨된 걸 믿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참가해도 겨우 주얼리만 받아봤다는 지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또 어떤 지인은 덕을 쌓아서 그렇다고 했다
우리도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겨우 3번 정도 참여한 중에 이룬 쾌거다
서울시내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왔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1등으로 뽑혔다는 건 대단한 거다
휴지도 받고 어떤 날은 훈제오리도 받았다
생각해 보면 비 오던 그날이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다
비가 오니까 꾀를 부리고 가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행운이다
그 이후로 가끔 비 오는 날에는 그날의 감동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1등 추첨 번호를 가지고 있었던 둘째 딸을 우리는 '럭키걸'이라고 불렀다
"니 덕분이야 너의 행운이 드럼세탁기를 선물했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움직여라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겼다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노력해서 일군 것만 가지고
필요한 만큼만 욕심내고 과한 욕심은 부리지도 않았다
그날만큼은 드럼세탁기가 욕심났다
신기하게도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무슨 조화인가
지금도 생각해 보면 놀랍다
인생리엑션을 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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