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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Nov 03. 2019

#34. 새로운 날들의 이모저모

몬트리올의 오늘, 그 조각들

화요일, 일찍 집을 나와 시내까지 걸었다. 웨스트 마운트를 관통해서 한 시간 정도를 걸으니 번화한 거리가 나왔다. 상업지구가 아니라 화려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길이 한가롭고 예뻤다. 이곳에 사는 한국 분께 걸어서 시내에 왔다고 하니 놀라신다. 파리에서는 걸어 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여긴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이면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다고 하니까...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걸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제는 집주인 미미가 겨울이 되면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했다. "더 추워지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르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혹한에 벌써부터 겁이 난다. 


꼭 추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도시락을 챙기는 일은 미미에게 익숙해 보인다. 지금도 가방 안에는 미미가 넣어준 작은 샌드위치가 있다. 빨갛고 앙증맞은 사과와 캔음료까지 참 살뜰히도 챙겼다. 미미는 피아노를 치고 요리를 한다. 피아노가 있는 살롱을 통과해 부엌에 들어가면, 늘 무언가를 만드는 미미가 있다. 단 한 번도 똑같은 키슈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미미. 불 앞에 선 미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인다. 그렇게 완성된 매일매일의 요리는 냉장고 속에 일렬종대로 담긴다. 손으로 쓴 정다운 이름표를 달고서. 마법의 냉장고 같다. 하나의 용기가 비면, 다음날은 다시 새로운 음식으로 채워진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도시를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미미의 음식이 나를 기다린다. 커다란 조각의 라자냐와 삶은 야채로 빈 속을 차곡차곡 채우는 동안, 미미는 시럽에 졸인 배에 초콜릿 한 조각을 올려준다.


늦가을의 몬트리올은 노랗고, 빨갛다. 발 끝에 차이는 낙엽을 보며 걷다가 고개를 들면, 색색의 낙엽이 우수수 내리고 있다. 잔디 위를 포르르 뛰어가는 다람쥐를 보면 여기가 캐나다구나, 싶다. 건물, 지형, 지하철, 신호등, 가로수,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까지 모두 새롭다. 아직은 낯선 도시의 얼굴. 길을 걷는 사람들 속에 섞여 눈치로 도시의 공식을 익힌다. 부가세가 따로 청구된다, 밖에서는 음주를 할 수 없다, 분리수거 시 음식물 쓰레기와 종이(!!)를 같이 버린다, 따위의 '보이는' 공식은 쉽다. 도시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명시된 약속이니까. 어려운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공식이다. 사람들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들. '문화' 혹은 '관행'이라고 불리는 것들. 기민한 감각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며 걷는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우측통행을 지키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이 타면 인사를 하는지,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이어도 (차가 없을 땐) 건너는지, 사소하지만 생활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질문에 하나씩 정답을 찾아간다. 


해외 체류는 이번이 네 번째다. 물론, 세 번의 경험이 모두 프랑스였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첫 번째는 어학연수였고, 두 번째는 학업, 세 번째는 취업이 목적이었다. 이번엔 어떤 이유를 갖다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캐나다에 와 보는 것이 버킷리스트이기도 했고, 여행도 하고 싶었고, 휴식도 좀 필요했고,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자면 끝도 없지만, 사실은 그냥 왔다. 이런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서. 그러고 보면 먼 곳에서 목적이 없이 살아보는 게 목적인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그래도 딴에는 네 번째라고 짐을 싸고 푸는 것도, 도착해서 행정일 보는 것도 수월했다. 짐을 자주 꾸리다 보면 챙기는 속도도 빨라지지만, 무엇보다 섬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게 된다. 유심핀이라든지, 문구용 가위, 물주머니 같은, 사소하지만 챙기면 좋은 것들이 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해외 정착을 시작하면 많은 행정일이 기다린다. 핸드폰 개통, 인터넷 개통, 은행 계좌 열기, 집 구하기, 이사, 보험 들기, (프랑스의 경우) 체류증 신청, 주택보조금 신청, 학교 등록 기타 등등. 하나씩 일을 처리할 때마다 나는 연명 장치를 하나씩 몸에 연결하는 상상을 한다. 새로운 나라에서 '살기 위해' 반드시 붙여야 하는 생명 장치들. 반대로, 그 나라를 떠날 때는 그 연명 장치를 하나씩 떼어 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은행 계좌를 닫으며, 집을 내놓으며, 핸드폰과 보험을 해지하며,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호스를 하나씩 하나씩 뽑는다. 그렇게 모든 연결고리가 다 끊어지고 나면, 그곳을, 그 세상을 떠나게 된다. 행정일은 어렵고 귀찮지만, 내가 누구인지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마치 도면을 들여다보듯, 내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사회에 속해 있는지, 그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물론, 유럽처럼 행정 시스템이 느리고 전근대적인 나라에서는 인내심을 측정(혹은 단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목요일 밤에는 창밖으로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잠을 설쳤다. 자비 없는 바람이었다. 밤새 나무들의 머리채를 난폭하게 흔들어댔다. 도서관에서 나와 테이블을 셰어했던 할아버지는 나무가 쓰러지는 통에 동네에 정전이 났다고 했다. 그 굵고 튼튼한 가로수 허리가 두 동강 날 정도의 바람이었다니. 저녁 식탁에서는 미미가 2015년에 있었던 아이스 스톰에 대해 들려주었다. 쉬지 않고 내리던 눈과 비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고 했다. 바닥에 쌓인 눈은 빙하가 되고, 점점 두꺼워지는 얼음의 무게를 못 이기고 가로수도, 전봇대도, 송전탑도 무너져 내렸다. 전기가 완전히 끊기고, 어둠이 집어삼킨 도시를 상상하자 소름이 끼쳤다. 생존을 위협하는 추위라니,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몬트리올은 깊은 겨울 속으로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매일 달라지는 미미의 키슈처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낯선 나날이 이어진다. 어디로 향하는 걸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늘이라는 조각들을 그냥 즐기기로 한다. 이 조각들이 모이면 어떤 그림이든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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