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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Mar 05. 2024

8시간

    수술동의서를 쓰고 심란한 마음에 한참을 뒤척였고 피검사 결과 혈당이 높아 칼륨을 링거로 맞는데 혈관통이 심해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간호사는 새벽 6시부터 내 상태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잠이 많아 아침기상이 늘 고역이었는데 이날만큼은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았다. 곧 다시 잠들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7시, 몽롱한 정신으로 침상에 누워 수술방으로 내려갔다.

    수술장 앞에서 가족들과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눴다. 웃으면서 잘하고 오겠다 했다. 이때만 해도 담담했다. 오히려 나를 괴롭혀온 악성 신생 물질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의기충천했다. 내 몸과 정신이 씩씩하게 수술을 이겨내리라 확신했다. 드디어 수술장 문이 열리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대형 병원의 수술방은 생각보다 더 많았고 각 방은 저마다의 준비로 수선스러웠다. 나는 닫힌 문들이 줄지어있는 긴 복도 끝에서 침상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내 방이 열리길 기다렸다.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혼자되자 덤덤했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몇 시간 뒤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하얀 천장이 마지막 기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까지 들었던 수술 후유증, 5년 생존율, 암 환자라는 사실 등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다시 눈을 뜬다 해도 예전의 내가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이 무섭게 몰려왔다. 몸이 떨리도록 흐느꼈다. 머리가 그리는 만약이라는 가능성의 공포에 휩싸여 가위눌린 사람처럼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나가던 한 간호사분이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 주셨다.

    10분쯤 지나서 내 침상이 수술방으로 옮겨졌다. 매체에서 보던 딱 그런 방이었다. 여러 집기와 약품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방은 어깨가 으스스하게 추웠다. 내 몸은 의료용 조명이 비추는 차가운 수술대 위로 옮겨졌다. 생년월일과 이름을 확인하자 눈이 감겼다.     

    8시간쯤 지나서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내 침상은 이동 중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일 새벽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 나를 보러 오던 레지던트 선생님이었다. ‘환자분, 수술 너무 잘 됐어요!’ 감격한 목소리였다.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그의 말은 암세포 박리가 기대보다 깨끗하게 잘 됐다는 것이다. 순간 의료진도 수술 전에는 종양 박리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었구나 싶었다. 꿈인가 싶어 다시 잠들었다.

    온전히 정신을 차린 건 회복실에서였다. 수술이 끝났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고 침을 삼켜보았다. 지난번처럼 시력에 이상은 없는지 눈을 껌뻑였다. 다 멀쩡했다. 영구적 장애 없이 수술이 잘 끝난 거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마음을 놓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두개골을 절개한 부위는 신기할 만큼 아프지 않았는데 소실된 목뼈가 너무 아팠다. 뼈 수술이 제일 아프다고 하던데 진짜였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마취 가스를 빼려면 크게 호흡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힘들었다. 진통제가 간절했다.

    모르핀의 효과를 생생히 기억한다. 정맥 라인을 통해 주사제가 들어오자마자 머리에서 발 끝까지 진동하던 통증이 사라지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수술 통증을 비롯해 33년간 느꼈던 육체적 피로함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갓 태어난 기분이었다. 인간이 왜 마약에 중독되는지를 정확히 몸으로 깨닫고 또 잠이 들었다.

    회복실에서의 며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통의 느낌만 생생하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시간을 체감할 수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 뒤죽박죽이다. 엄마와 오빠가 잠시 면회를 왔었다. 내가 살았음을,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들도 안도하며 기뻐했다. 호흡기는 물론이고 목에서부터 발등에까지 정맥 라인이 꽂혀 있었다. 이 라인들을 빼내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던 것 같다. 뇌수술 후라 계속 누워있어야 했고 호흡기를 뗀 후 겨우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얼마를 마시고 얼마가 소변으로 배출되는지 매번 간호사가 기록했다. 가끔 펠로우가 레지던트에게 호통치는 소리와 환자의 고성이 들렸다.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수술 후 이상 증상으로 밤새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태초의 카오스가 이러했겠다고 생각하며 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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