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만나다
산기슭에 있는 여중을 다녔다. 지금은 남녀공학이 된 학교이지만 여중과 여고가 함께 있는 학교로 도시지만 산속에 있어서그런지 세상과 단절? 된 채 여자들끼리 6년을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난 학교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별개의 문제다. 도보 통학이다 보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또래 남학생들을 찾기 어려웠다. 전설 같은 바바리맨 할아버지만 가끔 마주쳤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따라 간 곳에 남자아이들이 바글바글 있었으니, 바로 중간고사 기간의 시립도서관 열람실이었다! 처음 그곳을 알았을 때는 남학생들의 땀냄새와 바지 교복 끝단만 봐도 심장이 콩콩거려서 차마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그곳에 오는 남학생들도 우리랑 처지가 비슷한 이웃 남중학생들이었다. 그 학교는 우리보다 더 산속에 있다. 한마디로 산 하나에 서쪽에는 여중이, 동쪽에는 남중이 그리고 가운데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이 기가 막힌 도시계획은 누구의 장난인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열람실 좌석에 가방을 던져둔 아이들이 테라스 휴게실에 가득가득했다.
지금 기억으로도 아이들이 굉장히 북적였다. 앉지 못해 대부분 무리 지어 서있었다. 본능에 이끌려 산속의 도서관으로 모여든 아이들은 곁눈질로 서로를 탐색했다. 각자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주변에 어떤 이성들이 있는지, 새로운 얼굴들은 누구인지, 눈알만 굴려가며 자세히도 파악하고 있었다. 성격 시원시원한 오빠들이나 언니들은 거기서 서로 인사도 하고 아는 척도 하는 거 같았다. 나랑 내 친구들은 그냥 구석에서 잘생긴 오빠들이 있나 없나, 저번에 그 오빠들 무리가 왔나 안 왔나 살펴보기만 했다. 그때 서로 무슨 쪽지를 주고받았던 거 같은데 뭐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개인 연락처도 없던 시절이라 집전화번호를 주었던가?
나에게 도서관이란 강렬한 호기심이 가득한 사춘기의 땀냄새로 시작된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학교가 끝나면 떡볶이를 먹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열람실 아래층에 빌릴 수 있는 수많은 책들이 잠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계절이 바뀌고 난 후였다. 열람실은 따분하고 휴게실도 별 볼 일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책들의 공간으로 입장했다. 또한번 냄새에 압도되었다. 오래된 책들의 고유의 향기는 나의 호기심을 열었다. 사춘기의 땀냄새만큼이나 책 고유의 냄새도 인상적이었다.
그 계절, 도서관 봉사를 신청했다. 반납된 책들을 서가에 꽂고, 오래된 책들의 먼지를 털고, 책들이 제 주소에 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었다. 오래된 서가는 정말로 책들이 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도서관에서는 조용해야 하는 건가..?'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책들을 볼 때는 기분이 묘했다. 누렇게 변한 책장들을 넘기면 마법의 시간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엄마한테 어떻게 연락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낸 어르신 책들을 하나하나 살폈었다. 새로운 책들은 대부분 서가에 꽂히기도 전에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도서관을 떠났다. 인기가 사그라들고 나이 든 책들만 점잖게 서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짠했다. '내가 세상에 있다고!'... 나이차는 있었지만, 책들도 나처럼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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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는 전설적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게 된다. 충격이었다. 너무 쉽게 빨려 들어가서 중독적인 세계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멀쩡히 길을 걷다가 불시에 뒤를 돌아보며 추격자가 없는지 살피는 등, 지금 생각해보면 정상이 아니었던가 같다. 책과 현실을 분간하는데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긴 나의 왈가닥 중학교 시절 자체가 제정신은 아니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는 수업시간보다 착실하게 서로 빌려온 만화책을 교환해가며 열중해서 읽고(수업시간에는 쉬고ㅎ), 도서관에서는 이미 돌아가신(유럽 어느 소도시에 살아계실 거 같은) 아가사 크리스티 할머니의 세상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자주 접하는 책이라곤 교과서가 전부였던 책을 잘 모르는 아이였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세상이 증폭되고 이 지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잔혹한 어른들의 세계를 열어주었다면 나의 사춘기 호기심의 끝판왕은 [춘향뎐]이었다. 정말 아주 까~~ 암 짝 놀랐다. 지루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읽기 어려운 고전인 줄 알았는데... 그네 타다 갑자기 옥살이를 하며 어깨에 칼을 차던 얌전한 춘향이는 어디가고 고전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같았다. 어찌나 묘사가 화끈한지 15살 나의 심장은 벌렁대다가 튀어나올거 같았다. 아니 나랑 나이도 같은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왜 세상은 진보하지 못하고 이토록 퇴보하고 있단 말인가,, 그네 타다 눈 맞은 춘향이와 이도령이 사실은 꽤나 직접적으로 연애를 했었고 고전에는 그것들이 고스란히 표현되어있었다. 시대를 허들처럼 뛰어넘어 조선시대로 던져지고 싶었다. 처음 접하게 되는 무자비하고 거북스러운 살덩어리 영상물보다 자극적이고 놀라웠다.
다른 세계가 또 열린 것이다.
그렇게 하라는 봉사는 안 하고 서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밤에 만나서 밀담을 주고받고 서로 스치듯 다가 간 순간
아아악......!!!
부-욱하고 거칠게 책장이 찢겨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두장이나 북북- 거칠게 찢긴채 갑자기 날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절망의 끝에 있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혹시나 찢긴 낱장을 잘 접어 책 속 어딘가에 끼워놓은 건 아닐까 책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혹시나 똑같은 책이 한 권 더 있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어 서가를 이 잡듯이 찾아보기도 했었다.
절망이었다. 그때의 낙담은 나의 사춘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도 심장이 콩닥거리는 거 같고, 코끝에서는 오래도록 자고 있는 책들의 냄새가 나는듯하다. 서가들이 놓이고 옆 창문에서 해가 어떻게 들어왔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난다. 춘향이와 아가사 크리스티 할머니는 나를 정렬적으로 도서관에 빠져들게 해 주었다.
그 후로부터 쭉 나는 도서관을 사랑한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책이 열어주는 세상은 매번 매력적이다. 수많은 세상들이 차곡차곡 질서 정연하게 서가에 꽂혀 있는 것만 봐도 인류가 기특하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아이디어를 얻고 고민하고 연구하여 하고싶은 이야기를 책으로 소통한다. 그 주고받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각기 다른 사람들처럼 모두 다른 책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서관은 언제나 최고의 장소이다.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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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춘기의 포문을 열었던 열람실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잔재이다. 일본은 우리를 악랄하게 착취해 가려고 도서관을 세웠다고 한다. 농부들에게 일본어와 숫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공공도서관의 열람실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독특한 형태가 돼버렸다.
책들이 잠들어 있던 서가의 형태도 일제시대에서 많이 변하지 않아 아쉽다. 도미노처럼 서있는 서가들은 관리자들의 효율을 위한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쉽게 감시하고 통제해야 했다.
유럽의 많은 도서관들은 푹신한 빈백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고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기본적인 소음이 있는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사랑하지만 극도의 무소음을 지향하는 모습에서는 숨이 막히곤 한다. 작은 생활 소리에도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을 보면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오곤 했다. 인간이 움직이는데, 책장을 넘기는데 어떻게 소리가 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공공도서관이 조금 더 열리고 조금 더 편안해지는 동네의 사랑방이 되면 좋겠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집에 부모가 없고 갈 학원이 없어도 도서관에 가서 늘어져 책을 읽고 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참여했으면 좋겠다. 어른들도 언제나 부족한 지식을 채우러 도서관을 찾았으면 좋겠다. 책으로 배우고, 사람에게 배울 수 있게 도서관이 평생 배움의 교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 이 분야, 저분야 전문가들을 만날 예정이다.
아무리 비대면이 훌륭해지고 Ai가 인류를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도서관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했으면 좋겠다.
main photo ⓒ Patrick Robert Do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