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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Dec 14. 2022

설국

오롯이 나

밤새 눈이 내렸다. 거실 커튼을 젖히니 어스름한 새벽빛에 하얀 눈꽃이 내려앉은 풍경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이 식판도 가방에 담아 넣고, 보온 물병에 물을 채워 넣는 소소한 일 따위 잠시 미뤄두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깨지 않은 적막한 거실에 홀로 서 있거만 전혀 외롭거나 춥지 않았다. 분명 같은 온도였던 어제 아침에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이었다. 눈 때문이었다.


가장 빨리 세상의 풍경을 바꾸는 일은 눈만 할 수 있다. 엘사의 손끝에 닿은 세상이 꽁꽁 얼어 버리 듯이 눈으로 하얗게 탈바꿈한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겨울, 도서관을 나왔는데 온 세상이 그야말로 하얬다. 모든 건물과 나무들은 하얗게 정체를 감추었고 눈은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늘 차로 붐비던 찻길에는 드문드문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버스만 보였다. 색을 감춘 세상 속에 고요히 남겨진 풍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얀 세상,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지난밤 읽은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가가 책갈피에서 눈이 쏟아지는 소설들을 꽤 좋아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제일 유명하지만 이제하의 <나그네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도 만만찮다. 이제하의 소설을 읽은 뒤로는 나도 꼭 한 번은 폭설에 고립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겨울이면 「설국」 책을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과 비슷해 빙그레 웃음이 났다. 몇 주 전 눈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진눈깨비 비슷한 것들이 날렸으나 아직 첫눈이라 이름 붙여줄 만한 눈이 내리지 않았다. 내일 날씨가 춥다고 하던데 오늘 밤에 눈이 찾아오려나 내심 기다려졌다.


졸린 눈을 반쯤이나 뜨고 방에서 나온 아이들에게 "봐봐. 밤새 눈이 왔네."하고 속삭이듯 알려주자 두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창가로 뛰어갔다. 창문에 두 손을 붙이고 한참을 바라보다 "오늘은 좋은 날이네!"하고 말한다. 아이들에게는 눈이 오면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은 날이라고 말해주니 나도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교실까지 가는 길에 눈과 눈맞춤을 했다. 물기가 많은 데다 간신히 나뭇잎을 덮을 정도의 양이라 아침 햇볕에도 맥없이 스러지려 했다. 서로 엉겨 붙어 몽실몽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올리는 가짜 눈처럼 보였다.(진짜 눈이 가짜 눈처럼 보이는 마법.....) 그것들이라도 녹아내리지 않고 잠시 있어주면 좋겠다.


분명 스무 명의 아홉 살들이 눈싸움하러 나가자고 성화일 텐데......(눈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뭉칠 만한 양의 눈이 필요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눈만 보면 운동장에 나가자고 한다.) 동글동글 뭉칠 정도의 눈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사람의 순수함과 눈을 좋아하는 정도가 비례하는 것 같다. 눈으로 인해 빚어질 걱정 따위 없이 그냥 눈 내리는 것 자체가 좋은 순수함이 부럽다. 아침에 만난 눈꽃이 반가웠던 걸 보면 나도 어릴 적 순수함이 아예 녹아 없어지지 않았나 보다.



결국 아이들과 운동장에 나갔다.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고객들로 포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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