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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Dec 23. 2022

폭설에 출근해도 괜찮은 이유

요술 맷돌이 바다에 빠져 소금을 계속 만들어 낸 탓에 바닷물이 짜다는 옛이야기가 있다. 하늘에 있는 요술 맷돌은 눈을 만들어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하루종일 눈이 내리더니 밤에도 쉬지 않고 맷돌을 돌린 덕에(?)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일찌감치 유치원에서 차량 운행이 어렵다는 문자가 온 탓에 둘째는 이불속에서 나올 줄 모르고, 늦게나마 등교해야 하는 첫째는 오늘도 학교 가야 하나며 푸념이다. 폭설예보가 있었기에 학생들 등교는 30분 미뤄졌는데 교사들은 이마저도 해당이 안 되니 아...... 오늘도 험난한 출근길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통로 앞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정녕 나보다 일찍 출근한 이가 없는 것인가.....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소복이 쌓인 눈에 용감히 첫 발을 내디뎠다. 김구 선생님께서 눈길을 걸을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 발자국이 이정표가 될 텐데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했다. 패딩 부츠가 눈 속에 푹 잠겼다.


아침이면 들르는 집 앞 상가 커피숍에 갔다. 평소 커피숍에서의 패턴은 다음과 같다.

나 : (텀블러를 놓으며) 안녕하세요?

사장님 : 네, 안녕하세요.

나 :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기다린다.)

사장님 : 여깄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 : 안녕히 계세요.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나 : (텀블러를 놓으며) 안녕하세요?

사장님 : 눈 많이 오죠?

나 :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며) 와.... 정말 많이 와요.

사장님 : 그러게요. 한 5년 만에 이렇게 내리는 것 같네요. 저는 오늘 장사하려고 나온 게 아니라 그냥 눈보고 음악 들으면서 쉬려고 나왔어요.

나 : 댁이 가까우신가 봐요.

사장님 : 네, 가까워요. 그래도 차 가져왔어요.

나 : 이렇게 눈이 많은데 차를 가져오셨어요?

사장님 : 처음에 눈을 밟으면 덜 미끄러우니까 빨리 나왔어요.

나 : 저는 출근하는 길인데 아휴......

사장님 : 눈이 치워도 치워도 계속 쌓이네요. 조심히 가세요.

나 : 안녕히 계세요.


몇 달을 들렀지만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폭설을 뚫고 먼저 출근한 사람과 이제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자 몇 마디를 주고받게 된 것이다. 함께 공감한다는 것은 이렇듯 어색한 사이의 말문도 트이게 한다. 특히 공감하는 주제가 눈이라면 마음을 나누는 것이 더 포근해지는 것 같다.


우산을 써도 바람이 부는 탓에 아래쪽으로 자꾸만 눈발이 들어와 옷이며 가방을 적신다.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걸어 학교 앞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교감선생님과 다른 선생님이 눈을 치우고 계셨다. 도와드리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고 먼저 올라가라고 하신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호주머니에 있는 핫팩을 꺼내 교감선생님 손에 살포시 쥐어드렸다. 핫팩 하나에 따뜻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아셨는지 활짝 웃으신다.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은 날, 출근을 해야 하는 게 좀 슬펐는데 커피숍 사장님과의 스몰토크와 교감선생님의 웃음으로 게으른 마음이 싹 달아났다.


어제 포장해 둔 아이들 양말 선물도 전해주고, 카드 만들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화이트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잔뜩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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