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번
나는 불안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가 강사로 5년째 일하다 보니 회원들이 ‘내 수업에 만족하고 있나?’를 수시로 눈치 보고 체크한다.
그게 극에 달할 때는 두말할 것 것 없이 내 수업에 들어오는 회원 수가 줄어들 때이다. 3-4년 차 때 제일 심했던 것 같다.
요가원 센터 원장님에게 그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는지 여러 차례 묻기도 하고, 내 수업을 꽤 오래 들은 회원 몇몇에게도 물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놓아주려고 했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치려고 연습하며 노력해 봤다.
계량기로 재서 설탕을 넣은 만큼 달달해지는 베이킹과 달리,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노력을 들이부은 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불안-고민-탐색-개선 시도-(잠시) 잠잠-다시 불안‘이라는 시퀀스를 반복하다 보니 5년 차인 지금, 불안의 크기가 줄어든 게 느껴진다.
며칠 전 나와 연차가 비슷한 선생님과 수다를 떨다 이 주제에 대해 얘기가 나왔다.
선생님은 원래 자신이 불안이 높은 편이라 했다. 열정만큼 노력하기 쉽지 않은데 열정의 크기를 성실히 노력으로 보여주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결과가 원하는 만큼 없으니 방향이 잘못된 걸까, 하는 회의에 빠진 상태였다. 노력한 만큼 허무함과 막막함, 지치는 마음도 컸을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골똘히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그런 불안이라면 할 말이 꽤나 많은데, 생각해 보니 그런 감정 느낀 지 좀 됐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였을까. 삶에 더 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번뜩 떠오르는 건 ‘수련’이었다.
요가강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ttc(teacher training corse의 약자)를 결제한 순간부터 수련을 쉰 적이 없었다.
매일 수련을 하던 기간을 지나 지금은 주 2회를 하고 있고, 여행 중엔 며칠씩 안 한 날도 있어 루틴이 들쭉날쭉 해진 적은 있었지만, ‘그만한다’ 거나 ‘못하겠어’라는 마음으로 멈춘 적은 없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거기서부터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미숙하고 영영 완전한 성숙은 힘들겠지만, 그 미숙함을 채우려 눈치 보고 노력하는 값진 과정을 그저 불안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지 않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는 루틴이 있어 그 존재 자체에 새삼 고마운 감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