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며, 살아 내다

- 박조건형, 김비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박조건형이 그린 별것도 아닌데 예쁜 것들


우리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소도시 외곽의 공단 지역에 있는 스물네 평짜리 자그마한 아파트 어느 한 칸. 당신이 사는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도 스쳐 가고 있을 별것 아닌 일상 이야기를 특별하게 기록하면서, 우리도 당신처럼 살아 있다.
사랑하며, 살아 있다.
- 프롤로그 <우울 여행자의 아내> 김비, 중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닐까.

내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마주 앉아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누는 순간 삶이라는 별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 같은 느낌.


우울함을 견디는 이와, 우울함을 견디는 이를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가 이 책 한 권에 가득 담겨 있다.


별것도 아닌데 예쁘다는 그 말이 너무 예뻐서,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특별해서 기록하는 누군가의 삶이 기특하고 또 예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행복은 그리도 사소하게 찾아오기도 하는 법.

누군가의 일상을 엿보면서 나의 행복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니 어쩌면 우리는 매일매일 행복할 수도 있다는 희망.


그들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몇 가지의 단어가 참 좋았다.


박조건형

1977년생, 일상드로잉 작가

前 10년 차 생산직 노동자, 남자 페미니스트, 25년 우울증, 대학교 중퇴, 빡빡머리, 중국 아저씨, 짧은 다리, 초딩입맛, 박조건형 블로그, 캐릭터 양말, 방구는 크게, 인생은 가늘고 길게


김비

1971년생, 소설가

前 영어 강사, 남자+여자, www.kimbee.net, 바이러스성 간경화, 오늘의 숨결, 신랑 눈에 꼰대, 김구관 씨, 긴 허리, 초딩입맛2, 청록색 마니아, 농구 하는 아줌마, 방구는 크게2, 인생은 '나'를 지키는 것


나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들처럼 흉내 내고 싶어서, 나는 나를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나도 좀 멋지게, 재치 있게, 의미 있게 적고 싶다(아아- 아무래도 창의력 부족이다).


나는 이 책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반했다. 그들이 그리는 별것 아닌 일상이 궁금해서 바쁘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너무 빨리 넘어가는 페이지에 아쉬워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남기는 삶은 아무리 고되다고 해도 어쩐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충만하니까. 때론 그거면 가능한 순간들이 있으니까.


그들은 사랑하며 살아 있으니까.


책 속에는 #일상, 그리고 쓰다 라는 부제처럼 그들의 일상이 가득 담겨 있다.

남자는 그리고 여자는 쓴다. 그리는 남자만 있다면 외로웠을 것 같고, 쓰는 여자만 있어도 외로웠을 법 한데 그리는 남자와 쓰는 여자가 함께 있으니 꽉 찬 느낌이다. 그림도 좋고, 글도 좋으니 더 할 수 없이 좋고(나의 개인의 취향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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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는 당연히 신랑에게서 들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어린 시절까지 알고 싶고, 그래서 그의 가족에 관해 묻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연애 초기, 아버님에 관해 가끔 물었고 그때는 착한 여자 친구 병이라도 걸렸던 건지 아버님께 연락이라도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가, 신랑에게 된통 욕을 먹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었다. 나 역시 인연을 끊은 내 가족들과 연락하라고 하면 질색하면서, 사정도 제대로 모르고 신랑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맞다, 함께 하는 두 사람에겐 각자의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가족 말이다. 서로가 각자의 가족을 책임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까지 생각하고 배려하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가족 말이다.
- <아버지> 중에서,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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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태생을 가진 사람인지 이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오히려 훨씬 더 홀가분했다. 이전의 다른 남자들이 그랬듯 이 사람도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날 테니, 내가 먼저 도망칠 이유도 없었고 그럴 만큼 순수하지도 않은 나이였다. 마음껏 사랑을 즐겼다. 여섯 살의 나이 차이를, 그보다 더 넘기 힘들었을 태생의 한계를 서로 알고 있었기에 순간순간의 사랑을 온 힘을 다해 만끽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느끼면 느낄수록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겠구나'라고 깨달았고, 그래서 더 치열하게 사랑했다. 싸우고 토라질 시간도 나에겐 낭비였다.
사랑만으로도 모자랐고, 나에게 사랑이란 진신을 보여줄 수 있는 남자라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지구별에 하나뿐인 사람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나는 그렇게 사랑했다. 신랑에게 그때 사랑의 모양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겐 정말 그랬다.
- <연애 초기 인사동에서 만든 도장> 중에서,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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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다 보면, 그때 그 마음들이 시간에 뭉개져 보일 때가 있다. 김이 서린 창문처럼 말이다. 아무리 팔꿈치로 문질러도 더 흐릿해지는 것만 같다. 나 역시 지금은 그때의 그 순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반짝거렸던 햇살과 순수했던 마음들을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붙들고 있긴 하지만, 얄팍하게 만져지는 기억들이 이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 다툼과 섭섭한 마음이 쌓이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사랑은 늙어가고, 사랑이란 원래 변하는 거라고 인정해 버리면 간신히 붙들고 있던 그 모든 사랑의 기억마저 훼손되는 것 같기 때문에, 방법은 없다. 매일 그 사람을 새로이 사랑하는 수밖에. 기억하고 쓰고 그리며 내일 다시 또 사랑해야 하겠구나. 늙어가는 우리 사랑을 끌어안는 수밖에.

- <주차장에서 망중한> 중에서,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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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을 따라 휴일에 몇 번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 들어간 적이 있다. 농구장 2개를 붙여 놓은 정도의 공간에 여러 개의 거대한 통과 그 사이에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이어진 관들, 여기저기에 붙은 계기판들이 엉켜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나는 여전히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의 노동에, 아내의 노동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을까? 혹시 통장에 찍히는 숫자 몇 개로만 그 의미를 파악하며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음번에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되면 그가 하는 일을 꼭 세세히 알아보고 이해하고 싶다. 그래야 우리의 노동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노동이 아닌, 우리의 노동.

- <노랑 탱크차는 폐유를 싣고> 중에서,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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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랑은 그림처럼 웃는 모습을 잃어버렸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자고 약속했고, 출렁거렸던 시간을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삶의 의미를 잘 깨우치고 있는 듯했지만, 그는 그때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라고, 이 그림 속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우냐고 다그치고 싶기도 하지만 그냥 텅 빈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이제 나는 삶을 말할 때, 죽음을 말할 때, 그 어떤 순간에도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다가온 시간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어제의 삶에서 한 발 나아간 시간을 살고, 내 몫이었던 시간을 무엇으로든 기록하는 것. '기록'이란 시간을 거역하는 일. 그것만으로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란 삶과 나란히 서서 당당하게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별것 아닌 우리의 시간을, 아름다운 생의 그림들로 채워 가면서.

- <주리를 틀어라> p283


타인과 타인이 만나 마치 하나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게 사랑이고, 그걸 제도 안에 묶는 게 결혼이라면 사랑도 결혼도 그 착각이 오래 갈수록 유통기한이 늘어나겠지.


결혼이 원 가족과 새로운 가족 두 가지의 가족을 만드는 일이라면 그게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사회라면 우리의 착각이 좀 더 오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졌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보며 든 생각이다.


그들의 태생적 한계(그들이 책에서 밝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나름의 다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둘이 만든 가족 외에 각자의 가족을 같이 만나는 일이 없다. 남자는 자신의 가족을 만나러 갈 때마다 혼자 가고 여자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살아가는 모양이 모두 다르 듯, 사랑하는 모양도 모두 다른 게 당연하고 그러니 나는 그들의 사랑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조금 부러워하기로 했다.


자신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특별하게 그리고 기록하며 사는 삶, 자신들을 사랑하며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게 어떤 모양이든 부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응원한다.

그들이 그려갈 매일매일의 삶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멀리서나마 대답한다.


나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곳에서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 사람이 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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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 저자 박조건형, 김비 / 출판 김영사 / 발매 2018.09.10.



덧붙임.


이 책을 읽고 박조건형의 블로그를 검색했다.

매일 드로이을 하고, 블로그에 올리는 그의 블로그를 요즘 매일같이 기웃거린다.

저자는 자신을 우울하다 표현했지만, 아마 그리고 그게 사실일 테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나는 매일 위로받는다. 때론 이런 아이러니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건 아닐까.

https://blog.naver.com/buddhku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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