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
동생이 이사했다. 몇 년을 기다렸던 일이다. 강남의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재건축에 성공하여 입주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기대한 만큼 시설도 좋고 범접할 수 없는 가격을 형성하여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아파트다.
동생이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래층에서 계속 올라와 층간 소음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다음부터 조심하겠다고 가볍게 사과했다고 한다. 입시준비하는 아이가 있어 특별히 소음에 신경이 쓰인다 자신이 너무 예민해서 조금의 소음도 참을 수없다 등 이유를 대며 하루 건너 이의를 제기하는데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동생네는 뛰어다니는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조심할 것이 없는데 일상의 도마소리 TV소리도 뭐라 하면 어떻게 살겠냐며 큰 소리를 내고 드디어는 관리소에 중재를 요청했다고 한다.
요즘은 손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큰 소리가 날만도 한데 특별히 소음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동생은 이사 초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아래층 부인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고 한다. ‘이 아파트에 살려면 품위가 있어야 한다’면서 자기네가 변호사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자기네가 변호사라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을 이웃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인이 정말 이웃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의 이야기를 한쪽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어쨌든 이웃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불편하다.
나도 시골에 이사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산책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데 마스크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나가는 이웃과 마주쳤다. 그분은 내가 이 집에 사는지 이미 아는 눈치였다. 지난해 집을 고칠 때 들어와 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저 인사나 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그 부인은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중간에 작은 집이 있는데 그 집에 산다고 했다. 그러지 않아도 궁금했다. 거기에는 어떤 분들이 사는지.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만 본 적이 있다. 부부의 밭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남편과 나는 집주인이 부지런할 거라고 얘기하며 지난 적이 있었다.
길 가운데에서 이야기 도중 부인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면서 얼마나 슬프시냐 잘 이겨내길 바란다고 했다. 부인은 위로하는 나에게 도리어 화를 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에게 그렇게 말하는데 그 말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했다. 그 밖에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나는 무슨 말로 더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집에 들어와서 부인이 한 말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은 모든 생활이 무너졌다고 했다. 평소에는 부인이 많이 아팠고 남편은 건강한 편이었다고 한다. 집안일이며 농사며 모든 일을 남편이 해왔는데 남편이 갑자기 먼저 가니 지금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남편을 생각하고 매일매일을 울고 지낸다고 했다.
일상의 불편함도 말로 할 수 없는 듯했다. 부인은 운전을 배우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한다. 우리 동네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역이어서 대중교통 이용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차가 없이 생활한다고 상상하니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차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그 집을 바라봤다. 사람의 기척이 있나 불은 켜져 있나 혼자 도저히 살 수 없어 딸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나 부인의 우울증이 심해졌는데 혼자 있으면 어떡하나 등등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길에서 한번 본 이웃에게 막상 초인종을 누르기는 어려웠다. 가을이 지나고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다음 해 봄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부인이 잘 지내는지 물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그 집 툇마루에 놓기도 하고 함께 산책하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너무 어려울 때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친해지려 노력했다. 작년부터 부인은 편하게 나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도 만나면 먼저 가신 남편분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일상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해는 농산물 수확이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카톡이 왔다.
"꽈리고추 땄는데 필요하시거든 가져가세요. 노각두 몇 개 달려 있는 거 따시고요. 옥수수 잘 익은 거 골라서 10개 정도 따셔도 되고요. 내일은 옥수수밭을 정리할 거예요. 부담 갖지 마시고 가져가세요. "
"힘들게 농사 지으셨는데 돈을 드리고 사서 먹으면 안 될까요?"
"아니에요. 요긴하게 드시면 감사하죠. 상추도 막 크고 있으니 따가세요."
나는 저녁에 옥수수와 상추를 따왔다.
너무 미안했다. 힘들게 농사지은 것을 거저먹게 되었으니....
어느 날은 이런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비료 없으시면 우리 하우스에 쓰던 거 있어요. 가져가셔서 고추에 줘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 비료는 NK라는 것에요."
지나다 우리 고추가 시원찮게 자라는 것을 보고 부인 집에서 쓰던 비료를 줘 보라는 것이다.
지금은 부인이 도리어 나에게 농산물을 하나라도 주려하고 우리 고추를 걱정한다.
물론 자식들도 오가며 신경을 쓰지만 주변 이웃들과 소통하면서 부인의 모습이 한결 밝아졌다.
이웃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일도 좋지 않은 일도 직각직각 영향을 받는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복거총론에 나오는 살기 좋은 곳 4가지 요소 중 하나인 인심은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별일 아닌 것 같아도 서로에게 크게 상처를 입을 수도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시골의 이웃은 사람만이 아니다.
산책길에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동물이다. 산책길 동물이래야 개 아니면 고양이다. 고양이는 조용하고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에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도망간다. 하지만 개는 다르다. 산책을 하면서 개가 너무 짖거나 따라오거나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애완견을 키우며 개 예찬론자인 동생은 개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탓하지만 동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능력을 빼앗는 것이므로 동물과 인간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책길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개가 있다. 몸집은 작고 털이 길다. 털의 색은 짙은 검은색과 흰색이다. 얼굴도 두 눈 주위는 검고 이마에서 코 입까지 꼬리가 흰색이다. 사실 바둑이지만 검고 긴 털이 많아 나는 검둥이라고 불렀다(실제 이름은 워리라고 한다). 검둥이는 우리 집에서 100여 m 떨어진 이웃집 개다. 산책길에 만나는 개 중에는 큰 개도 많다. 지나가면 너무 짖어 놀래기도 하고 목줄을 하지 않은 개가 짖으며 따라와서 놀란 일도 몇 번 있다. 그런 개에 비하면 이웃집 개가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람보다 더 감정을 나타내는 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검둥이의 주인은 펜션을 한다. 펜션 입구에 빨간 지붕의 검둥이 집이 있다. 검둥이 집 옆에는 주인의 취미로 키우는 잘 정돈된 다육식물이 있고 검둥이는 항상 그 앞에 늘어지게 누워있다. 그렇다고 게으른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동네를 순찰하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사납게 짖으며 반응한다. 주인의 차를 따라가겠다고 마을 끝까지 따라가기도 하고 펜션에 오는 손님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그것은 손님이 주는 고기 한점 얻어먹는 재미로 그런다고 주인이 말해주었다. 처음 보는 손님들은 대부분 검둥이를 좋아한다.
그 검둥이가 산책하는 우리 부부에게 보이는 반응이 재밌다. 처음에는 산책길 우리를 향해 사납게 짖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짖는 강도는 점점 약해지고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를 보고도 짖지 않았다. 짖어도 자기 집 앞에 거의 엎드려 쿵쿵대는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적어도 자기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구나 하는 마음에 반가웠다. 우리에게 적대적 감정이 없는 것을 알고부터 우리는 검둥이와 친해지려 노력하였다.
남편과 나는 검둥이를 볼 때마다 검둥아 검둥아 이리 와하면서 호감을 보였다. 그러나 검둥이의 반응은 싸늘했다. 얼굴을 저쪽으로 돌린다. 어떤 때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짖는다. 분명 이웃인지 알고 있을 텐데 그동안 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의 서운한 표현인지 먼저 쌩 까는 모습이 재밌다. 검둥이는 아직도 삐져서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내가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검둥이와의 사이가 데면데면하게 지내지만 검둥이도 우리 이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이웃이다. 이웃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 이웃 때문에 상처가 치유되기도 하고 이웃 때문에 옷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