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일러스트레이터 풍요입니다.
약 2년 전 이맘때쯤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나왔다. 롱 패딩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추웠던 것 같다. 또,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이기도 했다. 허허벌판 같던 그때의 심정이 아직도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2년 후, 오늘의 나는 코엑스 페어 참가 신청을 앞두고 있다. 언니와 나의 1년 농사를 확인하는 자리. 오랜 준비를 했고 조금 지쳤으나 우리의 작업물들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에 기분이 묘하게 좋다.
퇴사 후 프로좌절러가 됐다. 회사생활을 할 때에도 좌절은 자주 겪던 상황이지만, 퇴사 후 좌절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좌절에 더욱 익숙해졌다랄까. 실망하고 넘어지는 일이 더 잦아서 그런지 오히려 굳은살이 박인 기분이 든다. 좌절을 겪어도 내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더 이상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해진 것을 느낀다.
그림 이야기로 감히 에세이 글을 써 내려갔던 작년.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다행히 그리고 있다. 세상에 질리지 않는 일이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물론 가끔 권태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원하는 그림 완성도가 나오지 않을 때인 것 같다. 가끔 머리채를 쥘 때가 있는데 이런 게 창작의 고통 언저리쯤에 가닿는 것인가 추측해보기도 한다. 그림은 아직도 미개척한 부분이 많다. 주로 수채화 그림을 그려서인지 디지털 그림도 잘 그리지 않는다.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수채화 표현이 늘 새롭게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니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좋아하는 장소, 나의 캐릭터 들. 얼마 전 우리 캐릭터 풍요, 하리, 반달을 저작권 등록했다. 그림과 같은 창작물은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아도 권리가 인정된다고 하는데, 등록하고 안 하고는 내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만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일이 즐겁고 신비롭다. 캐릭터들의 웃는 표정을 그리면 나도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을 준다. 그래서 캐릭터들의 표정은 대부분 밝게 그린다. 가뜩이나 웃을 일이 없는 일상에서 작은 미소가 어릴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자매는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지난달부터 크리스마스 그림을 그리고 퀼트 작품을 만들었다. 크리스마스는 단어 자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전구 색들과 반짝이는 오너먼트들, 따뜻한 분위기가 마음을 녹인다. 크리스마스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은 요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등록하는 K핸드메이드페어의 부스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잔뜩 녹여 넣을 계획이다. 우리를 찾아주는 모든 이들에게도 따뜻함이 전해지길 바란다.
마지막 일러스트는 어제 그린 따끈따끈한 그림이다. 우리 모두 몸은 다 컸지만, 마음속으로는 동네 문방구 앞에서 판매하던 멜로디 카드를 그리워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크리스마스 카드 꾸미기 세트를 오리고 붙여 반짝이 풀로 장식하는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이번 일러스트에 담겼다. 빈티지 카드를 참조해서 캐릭터들을 그려 넣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코엑스로 가기 전, 잠깐 적어 내려 가는 이 글은 올해도 좌절에 딛고 일어서서 내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염원하며 내년에도 이 길을 열심히 가고자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2021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