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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로운 민트초코 Apr 11. 2024

기특한 막내의 하루

난 똥만 싸도 박수갈채를 받지

6살 위인 오빠+5살 많은 언니+부모님으로 구성된 가계도에서 내 위치는 ‘쓸모는 없지만 귀여운 막내’다. 운전도 못하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지만 그냥 막내라서 괜찮은 무언가가 있다. 밥 잘 먹고 똥만 잘 싸도 괜찮은 존재로 취급되는 것.

때문에 나와 부모님의 대화는 약간 이상한 구석이 있다. 문자로 옮겨보면 이십 대 후반 자녀와 부모가 나누는 대화로 예측되긴 어렵다.

- 식당 여의도에 있는데, 찾아올 수 있어? (응 그 정도는 지도 보고 가지~)
- 아빠 사무실 놀러 와! 과자랑 아이스크림 있어. (과자 뭐? 아이스크림은?)
- 애기(실제로 이렇게 부름) 밥 먹고 양치했어? (응 치카치카 했어~)

지방 출장도 가고, 치과 비용이 무서워 양치도 잘하고, 과자보단 홍어삼합을 좋아하지만, 어쨌거나 부모님에겐 하굣길에 길 잃어버린 초등학교 1학년,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좋아해서 충치가 많았던 유치원생의 모습이 선명한가 보다.

그리고 가족이 아닌 다른 공동체에선 누군가를 마음껏 귀여워하는 게 여러모로 어렵고 조심스러우니, 아기 취급이 일종의 즐거운 놀이가 된 것도 같다. 나 역시 하루의 1/3 이상을 성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고 평가받으며 보내기에 나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 양치만 잘해도 칭찬받는 가족공동체가 위안이 된다.


그런데 최근, 반은 장난인 줄 알았던 엄마의 아기 취급이 꽤나 진심인 걸 알게 되었다. 반차를 내고 엄마와 한의원에 간 날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던 중 엄마가 물었다. 너, 몸이 어떻다고? 변비랑, 가위 눌리는 거랑...또 어디가 불편해?


마치 나 대신 한의사 선생님에게 내 증상을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꼬치꼬치 묻는 게 의아했다. (게다가 옆에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내 변비 소식은 비밀로 하고 싶다고..)


말 없이 엄마를 흘겨보자, 엄마는 아랑곳 않고 물었다. 엄마는 여기 발목이 아파. 너는 어디가 어떻게 안좋아? 똥은 얼마나 못 싼거야? (아, 이따 들어가서 얘기할게.)


마침 협력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밖으로 나가 3분 정도 통화를 했고, 기다림 끝에 상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찬찬히 내 증상을 물었다. 선생님이 묻는 것들에 대답했고, 선생님이 묻지 않아도 부연 내 증상을 설명했다. 침대에 누워 침을 맞았고, 한약을 지었다. 엄마도 함께 침을 맞았다. 한약과 두 사람의 침 값 20만 원 정도는 내가 결제했다.


때 마침 점심시간이라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한의원을 나와, 미리 찾아둔 근처 태국 음식점에 갔다. 태국은 우리 가족 다섯 명이 함께 갔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지다. 첫 해외여행에서 나는 낯선 향신료, 찰기 없이 날아다니는 밥에 적응하지 못했다. 여행 마지막 날인가 한식당에 가서야 겨우 밥을 먹었는데, 귀국길 비행기에서 심한 멀미를 하고 모두 게워냈었지. 초등학교 3학년, 비행기를 처음 타봤기 때문에 멀미도 처음이었다. 멀미라는 걸 알지 못하니, 어디가 아픈 지 잘 설명하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힘없이 훌쩍거렸다.


이젠 혼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닌다. 멀미도 하지 않는다. 고수를 생으로 씹어먹고, 메뉴판에 똠얌 쌀국수가 있으면 무조건 주문한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을 줄 알고, 의사에게 설명할 줄 알며 진료비와 약 값을 낼 수 있다.


태국 음식점에서 똠얌 쌀국수와 볶음밥, 텃만꿍(새우튀김)을 주문해 나눠먹었다. 밥을 먹고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다. 엄마는 늘, '너 먹고 싶은 걸로 두 개를 주문'하라고 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카페 수아를 주문했다. 그날의 커피는 베트남에서 마시는 카페 쓰어다 만큼은 아니지만 달콤했고, 역시 베트남 커피 만큼은 아니지만 아메리카노는 산미 없이 고소했다.

한의원에서 침 맞고 먹고 마신 태국 음식, 커피

커피까지 마시니 회사에 갈 시간이었다. 엄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고, 나는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엄마와 헤어지기 전에 회사에 가지 싫다고 조금 칭얼거렸다. 그래도 오늘 내 몫을 다해내기 위해, 어른이기 때문에, 회사로 향했다.


한의원을 나설 때 엄마가 말했다. "상담실에서 선생님한테 얘기하는 뒷모습을 보니까, 진짜 다 컸구나 싶었어. 막 회사 일로 전화도 받고..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네,네 하면서 전문가처럼 이것저것 얘기하고."


"엄마 나 한국나이로 29살인데. 그렇게 애기 같아? 초등학생도 의사한테 자기가 어디가 아픈지 정도는 보통 직접 말해...그리고...나 회사에서 팀 리드야..."


"막내는 원래 그래. 아무리 커도 그냥 애기 같아."


"그래. 기특해해줘서 고마워."


밥 잘먹고 똥만 잘 싸도 괜찮은 막내. 업무 전화를 받는 기특한 막내. 의사 선생님한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는 기특한 막내. 성과를 달성하지 못할까봐, 팀원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할까봐, 가슴께가 묵직한 압박과 책임감, 업무를 견뎌야 하는 회사에서의 삶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지만 위안은 된다.


엄마가 퇴직한 지 석 달 정도 지났다. 이놈의 회사 언젠간 때려치우고, 엄마가 가고 싶은 나라를 함께 가야지. 나 먹을 한약만 직접 지어도 기특해하는데, 여행비용까지 내면 또 얼마나 감격하시려나.

2018년 2월, 태국 농카이. 홀로 국경 넘은 설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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