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력 탐구생활 : 세로 본능, 가로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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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나희덕 #11월_중
예정했던 일정 하나를 슬그머니 뒤로 돌렸다.
종일 알바_에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일요일을 쪼개 쓰기로 했다.
둘 모두에게 꿀 같은 휴일이지만 응원이 필요할 시기에 호흡을 맞춰주는 건 할 수 있는 일이라 움직이기로 했다.
덕분에 인사동과 한강진을, 걸었다.
꽤 좋아했던 길은 복작하니 조금 난해해졌고, 다른 길은 여전히 낯설지만 흥미롭다.
- 그 중 한 곳은 좀 덜 걸었던 길을 골랐다.
그래봐야….싶지만 기웃기웃 털래털래 지역 작가 지원을 위해 마련한, 제주 갤러리를 둘러봤다. 어쩔 수 없는 치명적인 방향치 본능이 살아나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평소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다 보니 헤매는 정도로는 시선도 못 끈다.
첫 목적지는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였다. 11월 24일까지 진행되는 ‘있다—흙으로 빚은 제주의 결!(허민자)/내가 본 이어도!(김영갑)’를 일부러 골랐다.
태어난 곳은 제주가 아니지만, 생의 대부분을 제주에 바쳐 ‘제주 사람’으로 불렸던 두 예술가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하는 자리라는 점에 끌렸다.
올해로 작고 20주기를 맞은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 선생은 개발과 소멸의 경계에서 변화하는 제주를 집요하게 기록한 작가다. 그의 사진은 사라져가는 풍경을 시간의 켜로 묶어낸 하나의 시각적 증언으로 평가되고 있다. 허민자 작가는 제주 자연에서 받은 감각을 흙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통해 도예·공예 교육의 기반을 마련한 제주도예예술의 1세대로 꼽힌다.
손 끝의 감각으로, 한명은 찰나를, 다른 한명은 영겁을 다룬다. 순간과 축적, 기록과 생성의 호흡이 맞닿으며, 서로 다른 온도의 시간이 조용히 연결된다.
‘제주’라는 이름 앞에서 쉽게 눈 맞추지 못하는 섬 안 사람들과 달리 마음 끝과 바람을 잇고, 따스함을 채워 올려 오늘을 있게 한 낮고 깊고 긴 호흡이 공간을 누비고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있는 그대로의 섬을 품었던 다정함과, 제주 흙이 품은 지혜와 유연함을 빚고 다져 구워내는 세심함이 백마디 말보다 강하게 전해진다. 품은 사연이 어떠하건, 놓친 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것을 묻고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제주는 태어난 곳이 아니라 살아낸 곳”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사람 구경도 임계치를 넘어설 즈음 눈에 걸리는 찻집에 들어가 계피차로 목을 녹였다. 어쩌다 양쪽 자리 모두 일본 관광객들이라 그들의 대화를 심각한 척 흘려들었다.
한쪽은 가이드가 낀 중년 남성 그룹이다. 곁들임으로 고른 한과를 놓고 출신지 전통 간식과 더 맛보게 될 한국 음식에 대한 얘기로 화기애애했다.
다른 한쪽은 30~40대로 보이는 부부였다. 하필 이 계절에는 먹기 어려운 수박 화채 빙수를 1순위로 고른다. 여름에만 판매한다는 설명에 한과, 가래떡구이, 약과까지 고른 뒤 인증샷 찍고 살짝 맛만 보고 포장한 뒤 퇴장한다.
겨우 그 정도의 에피소드로 인사동을 다 봤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더 알려고 하지 않아고 이 곳은 한 눈에 들어온다. 아쉽지만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들어둔 도로는 오고가는 사람들의 불편을 산다. 서서히 영역을 넓혀온 공간에서 지하로 내려가고 다시 몇 층 더 올라가고 하는 것은 편하지 않은 동선이다.
오래된 골목들이 그러하듯 걷다가 툭하고 스치는 메뉴판에 발을 멈추고, 코끝을 건드리는 냄새에 식욕을 끌어올리고, 시선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재기 넘치는 것들을 손 안에 넣는 재미가 이 곳의 매력이라고 본다. 그 곳에서 부지런히 담은 기억과 기록은 그래서 가로 프레임에 잘 맞는다.
- 한강진에서는 몇 번인가 ‘어머나‘를 쏟아내며 방향치를 즐겼다. 봄과 여름 사이 둘러봤던 터러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가는 시기로 색이 바뀐 것이 보였다.
몇몇 매장 앞 긴 줄과 이제 인테리어 작업 중인 몇몇 곳, 전에 봤던 또 처음인 것 같은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평소처럼 ‘갈 곳‘하나를 찍고 직진했다.
향과 관련한 제품을 파는 업체의 편집숍은 그윽했다. 향이 진하지 않은 대신 공간 연출에서 향이 배어난다고나 할까. 디테일이 살짝 아쉬웠지만 구조상 어려워 보여서 패스.
괜찮은 향을 찾고 조금 흥분했지만 가만히 ‘침착해‘버튼을 눌렀다.
그 마음을 흔든 건 향에 관심이 많다는 매장 직원이었다. 망설이는 눈빛이 보였는지 한참을 지켜보다 대화란 걸 해준다. 자사 판매 제품보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향수에 더 관심을 보이더니 브랜드 명까지 확인한다.
관심사를 주고 받는 사이 내 손이 뭔가를 샀다.
한강진에 눈에 띄게 편집샵과 쇼룸을 겸한 카페가 늘었다. 홍보와 판매가 동시에 이뤄지는 효과를 꽤 유용하게 쓴다. 인증사진을 찍고 동네 구경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 걸 자연스레 이용한다.
전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인다. 주말이라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아 그 사이를 불편하게 비집고 들어가 어색하게 빠져나왔다.
-반나절 조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두 곳 모두에서 ‘골목’에 끌렸다.
보행자 우선으로 묶거나 차 한대 겨우 지나 갈 정도의 길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사람 다니는 길에 매장이 생기고 다시 사람을 부른다.
그래서 뭐가 먼저고, 뭐가 중요한가를 찾는 건 별의미가 없다.
사람살던, 골목이 먼저다.
동네의 시간성(Tempo of Places)이란 것은 의도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연륜있는 인사동이 가로 본능을 자극한다면, 한강진은 세로 본능 쪽이 강하다. 사진 찍어두기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으로 본다면.
다르게 쓰면 인사동은 가로의 연륜으로, 한강진은 세로의 호기심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이 로컬리티의 작동은 상권이 확장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사람이 머물 이유가 생겼지만 계속 유지하려면 도시 본능을 자극해야한다.
“지역을 바꾸는 건 ‘누가’ 그곳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며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렸다.
그것을 소비에만 맞춘다면 서로 끊임없이 갈 이유와 쓸 거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가…에 답이 있을까.
#그냥_생각 #다음은 또 어떻게 보일까 #인사동 #한강진 #그리고 #에프알로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