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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14. 2022

묵묵하게, 꾸준히 채워 낸 기록자의 흔적

그냥 제주 살아요- 제주문학관 특별전  '사월의 기억, 사월의 말

전 생애에 걸쳐 축적한 기억과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승된다. 개별적인 인간은 소멸하되 기록하는 인류는 미래를 꿈꾼다. 인류가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의 쉼 없이 기록하는 이유다. 기록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 안정희의《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중


제주 4·3하면 붉은 동백꽃이 떠오른다. 4·3 70주년 기념 사업으로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면서 전국에 강한 인상을 남긴 때문이다.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된 것은 제주 대표 화가인 강요배 화백이 1990년대 초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부터다. ‘통꽃처럼 져버린 목숨들, 산자들은 이제 그 서러운 사람들을 위하여 진혼의 노래를 부르는(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중) 그 진홍빛 흔적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자료를 뒤져보니 ‘오성찬’(1940~2012)이란 이름이 나왔다.

강요백 화백은 몇 차례 인터뷰를 통해 그 이름을 언급한다. “제주의 소설가인 고 오성찬 선생이 1988년 정리한 채록집 속 김인생 할머니의 증언이 모태가 됐다”는 내용이다.

김 할머니는  4.3때 남편과 자식 6남매 중 셋을 잃었다. 남은 자식 중 둘을 다시 병으로 앞세웠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김 할머니의 바싹 마른 가슴을 달래줬던 것이 다름아닌 동백꽃이었다.

“붉게 핀 동백꽃을 바라보거나 멀리 한라산 꼭대기에 쌓인 흰 눈을 쳐다보노라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 모습 속에 숨겨진 ’피의 역사’가 떠오르곤 한다. 흰 눈 위에 동백꽃보다 더 붉게 뿌려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아니 벌써 잊었다고 생각했던 무자년(1948년)의 4월은 내 인생과 우리 집안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백발이 성성한 한 4·3 유족이 귀띔한 얘기 속에서도 ‘오성찬’이란 이름이 나온다. “소설이 있어. 4·3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 됐었거든.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찾는 건 더 못하고. 억울해도 참았지. 어디 살아계실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어. 그런데 거기 거문오름 수직동굴에서 찾은 백골 사체 옆에 아버지 허리띠가 나온거야. 4·3 때 누가 밀어넣어 돌아가신거라고. 알게 되니까 찾으니까 그나마 가슴에 꽉 막혔던 게 풀리는게…” 4·3소설 <단추와 허리띠> 얘기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고 오성찬 선생의 특별전이 제주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고 10주년을 기리는 '사월의 기억, 사월의 말'이다.

오성찬 선생은 제주4‧3문학 1세대 작가다. 4·3을 체험한 작가로 그  상처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4‧3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됐던 시절, 문학을 통해 그 실상과 아픔을 알린 용기 있는 작가로 평가된다. 가해와 피해, 이데올로기 프레임 보다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재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기록했다.

 <하얀 달빛> <잃어버린 고향>등의 단편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아픔을 기록했는가 하면,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와 <죽은 장군의 증언> 등 4‧3을 소재로, 당시 공산주의자와 토벌대원의 삶 혹은 희생자들의 모습 등을 그리는 등 역사의식에 주목했던 작가였다.

일본 문학계의 거장인 오무라 마스오는 오성찬을 가장 제주적인 색채로 제주의 역사를 말한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지역 언론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던 오성찬 선생은 10여 년 동안 제주도내 마을의 지명유래를 밝히는 작업을 추진, 마을시리즈를 발간해 향토사 발굴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번 전시는 ‘기록자’로 그가 남긴 것을 따라 살필 수 있도록 구성됐다.

1부는 가장 제주적인 소설가로서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2부는 4·3문학가이자 기록자로서의 삶을 ,3부는 제주 마을 기록자로서 여정을 다룬다.

제주에 늘 성실했던 오성찬 선생의 삶은 전시장 한 켠 재연된 서재에서 살필 수 있다. 묻거나 묻힌 역사 속에 있으면서, 어느 한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현대사와 부대끼며 채록의 중요성을 체득한 그는 책 외에도 엄청난 분량의 녹음 테이프와 수첩, 필름을 남겼다. 상당수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서귀포도서관에 기증됐다.

손때가 그윽한 카메라와 신분증이 치열했던 젊은 날을 대신한다. 기자였기 때문인지 그래서 기자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순간 17 해녀 취재를 통해 보고서 외에 외장 하드가 터져라 자료를 어넣고 있는  사정이 생각나 조용히 웃었다.

전시 공간 유리벽에는 ‘사라진 장소를 기억하다’ 토속지명사전이 펼쳐져 있다.

1985년 첫 권을 낸 '제주의 마을' 시리즈가 남긴 소중한 자료다. 마을 지명이나 오름 이름 외에도 바다밭 이름까지 세심하게 조사한 노력이 느껴진다.  "혹은 귀양으로, 혹은 정치와 권력에 환멸을 느낀 끝의 유랑으로,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너와서 부평초처럼 정착했던 태초의 마을 사람들. 우리의 이 작은 작업은 이들 선민에 대한 애틋한 한 가닥 애정인지도 모른다. 정착 후 이들은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겼다. 거친 한숨, 고뇌의 숨결은 그대로 민요가 되었다. 쥐어지는대로 붙인 밭 이름, 바다 이름, 언덕 이름들이 그 마을의 역사와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짐작케하며 이날까지도 밭이랑의 돌멩이만큼이나 널려있다" 는 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아 한참 그 앞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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