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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Apr 15. 2022

어떤 날의 어떤 일

무엇을 위해 살지요? 

어떤 날은 신이 나고 어떤 날은 지루하며 어떤 날은 슬프다. 어떤 인생도 마찬가지다. 늘 신나거나 늘 지루하거나 늘 슬픈 사람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구는 둥글다는 진리보다 명확하다.

 

지난 2년 여 지구인들도 그랬다. 예전과 비교해 조금 더 당황스럽고 조금 더 슬프거나 두려워한 날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늘 어제와 다른 날들을 맞이하고 보냈을 것이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사람의 사회는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며 변함없는 진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어 왔다. 


그런데 요즘 의문이 생겼다. 모든 날들은 그렇게 각각의 색깔을 갖고 오며 가는데, 사람의 사회가 조금씩 진보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사회가 진보하는 것과 어떤 사람의 인생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사무실 입구에 설치돼 있던 체온측정기와 방문자 명부가 사라졌다. 아침마다 '정상인'을 확인해주던 기구가 사라지자 약간의 허전함 뒤에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한 개인의 생활이 진화한 것이고 나뿐만 아닌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일 테니 체감이 확실한 진화일 것 같았다. (진보는 체감할 수 있지만 진화를 실제 체감하는 생명은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년 시절에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을 겪고, 청년기에는 민주화 투쟁대열에 슬쩍 껴들기도 하다가 어느덧 늘그막 인생이 되어 기득권 비슷한 부류가 된 선배를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얘기가 나왔다. 선배가 물었다.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가장 가슴에 남는 게 뭐냐?”

가장 ‘큰’도 아니고, 가장 ‘자극적인’도 아닌, 가장 ‘기억에 남는’,  ‘가슴에 남는’이란 표현 때문에 대답이 대략 난감했다. 다행히 그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기억을 내놓았다.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하지 못하겠다며 항명한 뉴스를 봤는데,나는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 언론에서는 휴지통 기사처럼 잠깐 흘리고 지나갔지만. 그건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어…”


제복의 힘은 명령과 복종에서 나온다. 전쟁터의 군인에겐 더욱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군사강국에서 나왔으니 실로 엄청난 사건이긴 하다. 


“인류가 그만큼 진보한 거야. 국가보다 생명, 명령보다 양심… 과거 군인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의식의 진화가 일어났달까.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인데, 그걸 대대적으로 알린다면 지구촌의 각종 전쟁 패턴에 영향을 줄지도 몰라. 아마도 세월이 지난 뒤 역사학자들이 평가하겠지.”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요즘 언론들은 전혀 감이 없다고 그는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이익과 불이익, 신념이나 소신 따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들이 죽고 죽인다. 국가, 민족, 조직 같은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국가니 민족이니 조직이니 이런 것들은 모두 그 개인들의 효율적인 삶, 바람직한 인생살이를 위한 연대적 도구이고 개념 아닌가. 러시아의 항명 군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대체로 슬프면서 기운이 생긴 어떤 날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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