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포 Oct 31. 2022

겁의 힘

겁은 비겁과 다르다

보은-대추, 공주-밤, 고창-복분자, 안동-마, 문경-오미자, 상주-감, 가평-잣, 양양-송이, 장흥-표고…


품목별로 익숙해진 주산지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특화 농업이 결실을 맺은 느낌이 든다. 밤, 잣, 버섯, 더덕, 도토리 등은 척 봐도 임산물이고 사과, 배, 고추, 오이, 상추, 마늘 등은 당연히 농산물이다. 그런데 농산물과 임산물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품목들이 제법 많다.


더덕, 도라지, 고사리, 두릅, 오미자, 구기자 같은 밭작물부터 밤, 대추, 감 같은 수실류들이 그렇다. 이들은 산(임야)에서 자라면 임산물이 되고, 밭(농지)에서 자라면 농산물로 구분된다. 임산물은 산림청에서, 농산물은 농림부에서 관리하는데 재배하는 농가들이나 관리하는 정부부처나 둘 사이의 경계선을 놓고 오락가락하기 일쑤다. 마치 사람이 한국인의 DNA를 갖고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라면 미국인으로, 독일에서 자라면 독일인으로 사는 것과 같다.


한때는 이중 국적을 갖고 있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며 손가락질했지만 두 개의 나라든 세 개의 나라든 상관없이 그 나라별 의무를 다하면서 권리를 취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의무를 다한다면 오락가락이 대수랴.  


오락가락은 우왕좌왕과 비슷한 말로 중심이 없거나 어수선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하지만 오락가락을 이쪽과 저쪽을 계속 오가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보다 역동적 느낌을 받게 된다. 소통과 교류,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기능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다.  


 지난주 세종, 공주, 부여를 다녀오면서 밤송이들을 숱하게 봤다. 밤밭을 거닐던 노인에게 ‘이곳이 밤 주산지가 된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오묘했다.


“밤이 잘 되는 건 그만큼 평온하다는 거요.”

“??? 무슨 말씀이시진…”

“여기는 태풍 피해가 없거든.”


보충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이해를 했다.

밤나무는 태풍을 가장 무서워한다.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남·동해 쪽에는 밤나무가 적고, 충남·북 내륙에는 밤나무가 많은 배경이다.


노인은 밤나무를 “겁쟁이”라고 표현했다. 이유가 흥미롭다.

“사과는 따서 먹고, 고구마는 캐서 먹고… 나물이든 과일이든 사실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밤은 달라. 따기도 힘들고 벗기는 과정도 많고… 얘가 얼마나 겁이 많으면 겹겹이 싸매고 숨기고 있겠어.”


노인의 해석은 간단했다. 식물의 가시는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가시오갈피보다 더 가시가 많은 게 밤이라는 것이다. 둥근 밤송이를 조심조심 까느라 낑낑, 단단한 껍질을 힘주어 까느라 낑낑, 그 안의 내피를 정신 집중해 벗기느라 또 한참을 고생해 작은 밤 알갱이 하나를 먹었다.


“고생해서 먹으니 더 맛있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보배인 거여.”


밤 도인을 만나고 돌아오며 휴게소에서 군밤 한 봉지를 사 먹었는데 예전의 밤맛이 아니었다. 극단과 극렬이 요동치는 시대여서인가. 겁쟁이가 귀해 보인다. 어떤 때는 겁쟁이가 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술 당기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