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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Nov 14. 2022

짚신벌레에 대한 예의

겨울은 다만 춥다

아메바와 짚신벌레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단세포 생물이다. 또한 지구에서 최초로 등장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현미경으로 짚신벌레를 본 기억이 있다. 주변의 모든 정황은 흐릿한데 짚신벌레가 꿈틀거리던 모습 하나는 또렷이 떠오르고, 훌쩍훌쩍 세월이 흘러가는 와중에도 잊히지 않았다.


어느 시기 아메바와 짚신벌레가 ‘단무지(단순 무식의 줄임말)’를 대신한 적이 있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친구를 앞에 놓고 “너 아메바지?” 하는 조롱을 즐기던 시절이다. “아메바 할래, 짚신벌레 할래?” 하고 선택권을 주는 민주적 농담을 한 날, 조롱받는 걸 은근히 즐기던 동료가 갑자기 되물었다.


“둘이 어떻게 다른데?”


정말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의지가 엿보였고, 그런 자리에 늘 존재하는 학구파가 둘의 차이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아메바는 죽을 수 있고, 짚신벌레는 먹어도 죽지 않아.”


단세포도 살인형과 봉사형이 있다나. 그 미세한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학구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오오,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리고 동료는 기어코 선택을 했다.


“난 뭐 당근 짚신벌레네. 내게 독성은 없잖아.”     


짧은 지식을 접한 후 짚신벌레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짚신벌레는 이름부터 불쌍하다. 먹잇감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되는 생애도 애잔하다. 동물 취급도 안 하면서 벌레 부류로 넣은 작명자의 저의도 불순하고, 신발이란 일반명사가 있는데도 굳이 짚신을 콕 짚어 붙인 것도 지구 최초의 생명체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대한 단세포 짚신벌레는 말이 없다.  


단세포의 후예들은 세포분열을 거듭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영장류로 진화했다. 싸우고 의지하고 잡아먹고 잡아먹히며 나름대로 공존의 룰을 만든 진화였다. 이를 자연(自然, nature)이라고도 하고 먹이사슬(food chain)이라고도 한다. 자연은 평화롭고 먹이사슬은 폭력성을 잉태하고 있지만, 이면을 보면 자연에는 위험이, 먹이사슬에는 안전이 숨어 있다.


본격적인 겨울, 북쪽에서 철새들이 날아오고 있다. 이 평화로운 자연 현상 속에서 우리는 조류인플루엔자(HVAI)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지난 겨울, 유럽에서 AI 발생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올해 우리나라 발생률도 적을 것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과거 통계를 빌려 전망한 바 있다. 그러자 지난 겨울, 시베리아에서 AI 발생이 예년보다 많았기 때문에 올 겨울 우리나라 닭들은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계란 유통인이 시장 감각으로 반박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살펴볼 일이지만 그 근거들은 믿음직하지 않다. 굳이 우주를 논하지 않더라도 복잡계에 속한 인간들은 짚신벌레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장구한 세월의 진화는 알 바 없다. 다만 한 생을 보내는 개인의 진화, 그 시대의 진화는 어때야 하는지 궁금한데... 스산한 계절을 맞는 짚신벌레의 후예는 개와 돼지에 비유되는 것조차 대우받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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