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집에 대하여
강릉 경포 해변에 ‘유리집’이란 술집이 있었다. 경포 백사장의 약간 북쪽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사방이 유리로 트여 있는 곳이라 ‘유리집’이라 불렸다. 예닐곱 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은 고작 7~8개에 불과한 ‘해변의 실내포차’였다(돌이켜 생각하니 가건물이었다).
여기에서 마시는 술은 소주와 맥주, 안주는 물오징어, 덤으로 멍게와 해삼이 달려 나왔다. 통유리창 바깥으로 까만 바다를 보며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이들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까만 바다란 게 사실 별게 아닌데도 말이다.
유리집은 아주 단순한 메뉴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무 인테리어나 조명 없이도, 사람을 유혹할 줄 알았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싶다면, ‘유리집으로 가라’는 격언도 있었다. 술을 세 병쯤 마신 뒤에도 멀리 검은 바다의 불빛이 보이지 않으면 ‘인연이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불빛이 보이면 ‘천생연분!’이라는 희한한 점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빛이 많이 나타날수록 궁합이 잘 맞는다는 의도적인 점괘도 있었으니, 그 불빛의 주인공은 오징어잡이 배들이었다.
사실 그때는, 태풍이 몰아칠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늘 오징어잡이 배가 떴다. 밤 10시 무렵이면 오징어잡이 배들이 창밖으로 나타나 유리집 연인들을 도와주었다. 그 불빛을 보며 오징어 회를 먹으면 ‘횟집에서 오징어가 제일 싼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경포에는 숙박업소가 널려 있었다. 휘영청 달빛 감은 솔밭을 지나면 수많은 여관들이 유리집의 점지를 받고 나온 천생연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징어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지샌 연인들은 이튿날 바닷가 솔밭을 걸었다. 길 따라 곳곳에 오징어 건조터가 있었고 축축 널려진 오징어들은 빨랫줄에 걸린 속옷들처럼 보였다. 하도 많으니, 지키는 사람도 없고 거들떠볼 마음도 안 생겼다. 그때 이미 알았다. 많고 흔한 것만으로도 천대받는 이유가 된다는 걸.
오징어는 술과 친하다. 술에 맞춰 애인처럼 변신하기도 한다. 맥주를 마실 때는 마른 오징어로, 소주를 마실 때는 물회로, 양주를 마실 때는 김이나 땅콩 같은 친구들과 함께 등장한다. 요리용으로 가공용으로 응용 범주가 무한궤도다. 너무 흔한 존재라 값도 제대로 못 받고 각양각색 치장을 달리하며 팔려나가는 신세, 가엾고 불쌍한 오징어들이 꼭 나를 닮은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내가 만일 오징어라면 어찌할 것인가, 고민한 결과를 발표한다.
우선 몰려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값을 올려야 하니까, 그물에 무더기로 걸리기보다는 우아하게 낚싯바늘에 찔리리라.
기왕에 잡힌다면 즉시 냉동고로 넣어달라고 시위하겠다. 스트레스 받으며 시들해지느니 산 모습 그대로 싱싱함을 유지하리라.
‘건강에는 오징어가 최고’라는 어설픈 홍보도 하지 않겠다. 개나 소나 ‘내가 최고’라는 주장에는 먹물이나 뿌리고, 술이나 한잔 하자는 연인들에게 기꺼이 씹히는 맛으로도 족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