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어떤 여행지에서

by 포포

지난 가을, 가깝게 지내는 여자가 유럽의 몇 개 나라를 다녀왔다. 목적이 분명한 갤러리 순회 여행이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의 도시들을 순회하며 지역별 대표 미술관과 크고 작은 화랑들을 살펴보고 돌아온 것이다. 여행이 어땠는지 물었더니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

“참 좋았어요.”

그 답이 참 좋았다. 무엇이 어떻게 왜 좋았는지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참 좋았구나, 속에 무한한 좋음이 있었다. 하지만 무한함을 즐길 수 없게끔 이미 퇴락한 나는 기어이 묻고 말았다.

“뭐가 가장 좋았어요?”

“작은 갤러리들. 작지만 색깔이 분명한 개인 화랑들. 가령, 파리의 마네모네 갤러리는 일 년 내내 마네와 모네의 작품만 전시하는데 유료 관람객들이 꾸준해요. 연회비를 내고 시시때때로 와서 그림을 보는 고객들이죠. 할머니 할아버지들, 비즈니스맨들, 주부들… 계층도 다양하고.”


같은 작가의 그림을 시시때때 반복해서 본다… 재밌는 영화도 반복해서 보기란 쉽지 않은데,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 평면의 그림에서 그들은 무엇을 얻는 걸까.

“뭐, 여러 가지겠죠. 몇 명 인터뷰를 해보니 ‘일이 잘 안 풀릴 때 여기 오면 영감을 받는다’, ‘마음이 편해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상처를 낫게 해주는 곳’ 등등 다들 이유는 달랐어요.”

세상에, 참 좋았다는 느낌의 일부를 겨우 가늠해보았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인간들이 찾아가는 곳은? 술집, 점집, 친구집, 그리고… 그림집이 있을 줄이야.

<마네가 그린 모네 부부>


나와 전혀 가깝지 않고 만날 일이 거의 없는 남자가 있었다. 베트남에서도 아주 외진 마을에 사는 청년이었다. 여행을 온 외국인에게 마을을 안내하는 직업을 갖고, 제법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 볼 때, 청년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왠지 시골에서 썩고 있는 듯하여) ‘당신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청년이 천진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살아요.”

혹시 ‘꿈’, ‘희망’, 이런 단어를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확인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꿈을 갖고 사는 것이 인생의 필연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이라면, 꿈을 갖지 않고 사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란 얘기였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답이었다. 그 뒤부터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꿈을 갖고 사는 이와 꿈을 안 갖고 사는 이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까?


2018년이 저물어 간다. 아마도 연초에 꾸었던 꿈을 못 이룬 사람이 이룬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꿈은 용기를 내게 하고 지향점을 갖게 하는 훌륭한 무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윽박지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에 스스로 속박당하지 않기를, 새해의 꿈으로 세울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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