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껌을 씹었다

씹히고 버려지고 잊혀질지라도

by 포포


나도 한때 껌을 좀 씹었다. 골목길에서 짝다리를 하고 말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실눈으로 째려보는 것만으로도 우월적 지위가 확보됐었다. 그야말로 껌 같은 시절 얘기다. 성냥팔이 소녀와 껌팔이 소년이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 물론 찰나처럼 사라졌다. 그때 껌을 좀 씹던 친구가 골목길 담장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내 꿈은 말야, 껌을 짝짝 씹으며 죽는 거야. 씩씩하게,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듯이.”

멋졌다. 녀석과 같이 껌을 씹으며 짝다리를 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황홀했고, 달콤했고, 조만간 그런 꿈을 이루게 되지 않을까 설레었다. 하이고야, 귀여운 녀석들.


후배가 놓고 간 (선물로 남긴 건지, 버린 건지, 잊은 건지는 모르겠다) 책 중에 <껌북>이 있어 종종 들춰본다. 딱, 손바닥 만한 사이즈. ‘껌으로 할 수 있는 999가지’란 부제가 달려 있다. 의외로 많다. 이 책을 꺼내는 때가 딱 이맘때인 것을 이번에 알아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이맘때 이걸 봤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내 인생이 껌 같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999가지 중 겨우 몇 가지만 옮긴다.


-뽀뽀할 때는 반드시 껌을 씹는다.

-동전이 필요할 때 껌을 산다.

-과속으로 달리는 티코를 껌으로 세운다.

-시간이 흐르지 못하게 껌으로 시계바늘을 정지시킨다.

-높은 산에 올라 귀가 멍멍할 때 껌을 씹는다.

-껌 뱉는 거리를 만든다.

-껌 108개를 줄에 꿰어 두었다가 하나씩 씹으며 번뇌를 잊는다.

-껌을 친구와 마음을 나누며 씹어서 감성지수인 EQ를 높인다.

(이렇게 실용적인 사용법이 있는가 하면)


-껌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껌을 휴대용 정조대로 쓴다.

-수능시험장에 엿 대신 껌을 붙인다.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게 껌을 씹게 한 다음, 경매로 판다.

-하나의 껌을 정확히 한 달만 씹으면 고무가 되는데, 한 6년만 고생하면 고무신 한 켤레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상업적인 사용법도 있고)


-껌 모으기 운동을 벌여 바다에 껌섬을 만든다.

-모나리자에게 껌을 선물해 안면근육 운동으로 자연스런 표정을 짓게 한다.

-루돌프 사슴 코에 붙은 전구를 껌으로 붙여준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손에 껌을 붙이고 들어가 잘 잡고 나온다.

-자주 길을 잃는 어린 양을 다른 양과 함께 껌으로 붙여둔다.

-여성호르몬 성분을 껌에 넣어 갱년기인 어머니께 드린다.

(이렇게 불경스런 사용법도 있으며)


껌으로 딱지치기를 하거나, 껌으로 별을 만들어 태양계에 껌성(星)을 추가하거나, 껌종이를 태워 껌을 구워먹거나, 벽에 생긴 못구멍을 껌으로 메운다는 등 창조적 제안들도 나온다.


그것들을 보면 한때 껌 좀 씹은 것에 닭살이 돋는다. 오만 가지 사용법 중에 고작 짝다리 집고 씹는 것밖에 못한 당신…

비록 껌일지라도, 씹히고 버려지고 잊혀질지라도 자존(自尊)하길. 죽음 앞에서도 껌 좀 씹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2019년을 앞두고 갖는 작은 바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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