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남자

관점이 바뀐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by 포포

초딩 모임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초딩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잘 모르겠다. 각양각색의 직업에, 사는 곳도 이제 천차만별이다. 친구들은 서로 근황을 묻는다. 한잔의 술에 괴로움을, 또 한잔의 술에 위로를, 또 한잔의 술에 자긍심을 담는다. 간간이 건강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사랑 편력을 자랑하는 친구도 있다. 물론 옛날이야기가 제일 재밌다.


그럭저럭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명함도 없고, 직책도 없고, 자랑할 자식도 없다.”
갑자기 침묵. 아무것도 없는 친구가 침묵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아, 미안. 불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직업이 없었던 게 아니고 지금 없다는 얘기지. 가장 최근 직업은 제주도에서 대리기사를 한 거였어.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어서 간 곳이 제주도였고, 거기에서 두 달 동안 대리기사 하다 돌아왔지. 그래서 다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는 친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하도 많은 직업을 거쳐서 딱히 무슨 일을 한다고 하기 힘든 거지.”

아무것도 없는 친구는 정말 많은 직업을 거쳤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친구의 과거 직업 떠올리기 게임을 했다. 뚝딱뚝딱 기억들이 잘도 튀어나왔다.

식당을 했었지. 호프집으로 바꾸었고. 그 다음이 비디오가게였나? 문구점이 먼저였지. 시장에서 야채장수를 한 건? 생선장수가 먼저 아닌가? 만화방은 언제였나. 당구장도 기억나. 옷가게도 있었고. 도배도 하지 않았나? 택시기사. 그건 두세 번 되지? 포장마차는 기본이고. 노가다. 심부름센터도 운영했지? 철거업으로 돈을 좀 벌었다며? 인력회사도 했고. 조명기구 장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 전에 철물점 했고. …작심하고 듣자면 한이 없을 듯했다. 얼추 지루해질 무렵, 외국 생활을 제법 오래 한 친구가 말했다.
“네 직업은 핸디맨이다. 뭐든지 다할 수 있는 사람.”

핸디맨(Handy Man)은 영·미 생활권에서 널리 활용되는 직업이라 한다. 집 안팎의 사소한 불편이나 고장을 해결해주는 사람. 전문 업체나 수리공을 부르기에 부담스런 경우, '뭐든지 해결해 주는' 핸디맨을 부른다고 한다. 전문가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절차가 간단하며 무엇보다 이것저것 한꺼번에 많은 부탁을 해도 되는 편안함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전문 수리공은 오직 하나만 해결하지만, 핸디맨은 뭐든지 다 해결해.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많은, 일종의 슈퍼맨이지.”


아무것도 없는 친구가 말했다.
“그렇지.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긴 해. 걔네들, 핸디맨인가 뭔가보다 더 많은 걸 해결할걸?”
‘아무것도 없는 친구’는 졸지에 ‘뭐든지 가능한 슈퍼맨’이 되었다.


이튿날, 아무것도 없는 친구, 아니 뭐든지 가능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친구야, 지금 남북회담 생중계를 보고 있는데, 왠지 내가 하는 것 같다.


관점이 바뀐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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